▲ 영휘원
▲ 숭인원
1. 홍릉 수목원 근처에 있는 왕실의 무덤
서울시 동대문구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과 1호선 청량리역 부근에는 ‘홍릉’이라는 지명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제20대 왕 경종의 능)를 소개할 때에 이미 설명하였듯이, 이 일대는 천장산(天藏山)의 줄기가 이어진 곳으로 본래 명성황후(1851~1895)의 무덤인 홍릉이 있었다. 바로 지금의 홍릉 수목원 자리이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1897년) 때에 경복궁 건청궁에서 시해되었는데, 처음에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은 지금의 홍릉 수목원(홍릉숲) 자리에 만들어졌다.
그 후 남편인 고종은 1919년 1월 21일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의 무덤은 현재의 홍릉(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순종 황제의 무덤인 유릉과 함께 ‘홍유릉’이라고도 부름)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이때 명성황후의 능 자리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하여 고종의 능에 합장되었다. 즉, 오늘날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은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가 합장된 무덤이다. 이렇듯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은 다른 곳으로 떠났고, 홍릉숲은 훗날 국립산림과학연구원 부속의 전문 수목원이 되었다.
홍릉 수목원 입구 맞은편에는 세종대왕 기념관과 숭인원, 영휘원이 있다. 세종대왕 기념관에는 제4대 왕 세종의 무덤인 영릉의 석물들과 장명등, 망주석, 신도비 등이 있다. 본래 세종의 무덤인 영릉은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세조 때에 영릉의 터가 좋지 않다고 하여 현재 위치인 경기도 여주시로 옮겼다. 이때 영릉에 있던 석물들은 그 자리에 묻었고, 여주의 영릉에는 새 석물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마도 워낙 무겁고 거대하여 옮기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73년에 이 땅에 묻었던 석물들을 발굴하여 지금의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기념관 경내에 청계천 수표(보물 제838호)와 세종대왕 신도비(보물 제1805호), 구(舊) 영릉 석물이 전시되어 있다.
사적 제361호에 지정되어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은 세종대왕 기념관과 담장 하나를 경계로 나란히 위치해 있다.
▲ 청계천 수표(보물 제838호) | 세종대왕 기념관 안에 있다.
2. 영휘원(永徽園)
▲ 영휘원
▲ 재실
우선 영휘원(永徽園)은 조선 제26대 고종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의 무덤이다. 순헌황귀비는 흔히 '엄비'라고도 불린다.
일부 백과사전에는 고종의 계비(繼妃)라고 소개되지만,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계비는 첫 번째 왕후 이후에 엄연히 정식으로 맞아들인 왕후를 말한다. 순헌황귀비는 황후가 아닌 황귀비이므로 계비가 아니라 후궁이다.
순헌황귀비는 본래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었다. 그러다가 1885년 고종의 승은을 입고 명성황후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에 다시 궁궐에 들어와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아관파천 때에는 고종을 모시면서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하기도 하였다. 그 후 1897년에 고종의 셋째아들인 의민황태자(영친왕)를 낳고 귀인에 봉해짐으로써 상궁에서 정식으로 후궁이 되었다. 1903년에는 황귀비가 되었다. 순헌황귀비는 명성황후가 세상을 뜬 이후부터 고종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며 사실상의 왕후 역할을 하였다.
순헌황귀비는 신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양정의숙(현 양정고)과 진명여학교(현 진명여고)를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는 데 거액의 후원금을 기부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 교육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3. 숭인원(崇仁園)
▲ 숭인원
숭인원(崇仁園)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의 맏아들 이진(1921~1922)의 무덤이다. 이진은 대한제국의 원손인 셈이다. 1907년 의민황태자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에 인질로 끌려갔었는데, 이진을 낳은 때는 1921년 8월이다.
의민황태자는 1922년에 잠시 국내로 귀국하였는데, 이때 덕수궁 석조전에서 이진이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불과 생후 8개월 된 아기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순종 황제가 왕자의 묘에 합당하도록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고, 묘호를 숭인원이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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