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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대한제국 시대의 비석, 장충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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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충단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장충단 공원 안에 있다.

 

 

 

서울시 중구 장충동,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근처에는 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의 명소가 많이 모여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불리는 태극당’,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경기장인 장충체육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동국대학교, 그리고 수십 년 역사를 자랑하며 저마다 원조를 주장하는 족발집이 모여 있는 장충동 족발 골목 등.

 

 

그 장충동,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장충단 공원이 있다. 이 동네의 이름이 장충동인 까닭은 바로 장충단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장충단(奬忠壇)은 을미사변 때에 경복궁에서 일본인들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충신과 열사들을 위해 세운 제단이다.

 

▲ 장충단비 앞에 있는 장충단 터 표지석

 

 

 

을미사변이란, 1895(고종 32)에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천궁에서 시해된 사건이다. 이때 경복궁에 침입한 일본인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싸우다가 시위대장 홍계훈,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한 많은 군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고종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1900년에 남소영 자리(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근처)에 사당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장충단이다. 장충단비는 이때 장충단에 세운 비석이다. 남소영은 조선 영조 때에 세운 한양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군영이다.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일제는 장충단이 있던 자리에 공원을 만들었으며, 심지어 침략의 원흉이자 안중근 의사에게 죽음을 당한 이토 히로부미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한 절인 박문사를 세웠다. 박문사는 광복 후에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신라호텔이 들어섰다.

 

장충단에는 제사를 지내던 사당과 부속 건물이 있었지만, 6.25 때에 사라졌으며 장충단비만 남게 되었다.

 

​▲ 장충단비 앞면 | 1900년 장충단을 세울 당시에 황태자였던 순종의 글씨이다.

 

▲ 장충단비 뒷면 | 비문은 민영환이 쓴 것이다.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석으로 1900년에 세워졌다.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에 지정되어 있다

 

비석 앞면에 새겨진 장충단이란 글씨는 순종의 어필이고, 뒷면의 비문은 민영환(1861∼1905)이 썼다. 비석은 현재 장충단 공원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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