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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고종의 비 명성황후가 살았던, 명성황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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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성황후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 

▲ 명성황후 생가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46호)

 

 

 

현재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명성로 71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는 이름 그대로 조선의 제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비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난 집이다.

 

명성황후는 영천군수를 지낸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는데, 이 집에서 8살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후 한양으로 올라가 지내다가 16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 집은 본래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1688년에 지어진 집이었다. 민유중은 그 유명한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다시 말해 명성황후는 인현왕후의 후손인 셈이다. 본래는 안채만 남아 있었는데, 1990년대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 등이 복원되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 명성황후 초상화

 

 

 

명성황후는 고종 32년인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에 경복궁 건천궁에서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분분하기 때문에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 왕비가 될 수 있었던 배경

 명성황후 순국 숭모비

 

 

을미사변은 서울시 중구에 있던 제단인 장충단과도 관련이 있다. 을미사변 때에 경복궁을 침입한 일본인들을 막아내다가 죽은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연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군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하도록 만든 제단이 바로 장충단이다.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1799~1858)은 제19대 임금 숙종의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5대 손이다.

민치록은 슬하에 13녀를 낳았는데 명성황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릴 때에 죽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민치록도 명성황후가 겨우 8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쉽게 말해 명성황후는 편모슬하의 외동딸로 자란 셈이다. 이것이 바로 흥선 대원군이 고종의 왕비로 명성황후를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60년 넘게 이어진 세도 정치는 다른 말로 외척 정치였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의 외척 가문은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들의 가문에서만 왕비를 계속 배출시켜 이를 바탕으로 정권을 유지하였다.

 

세도 정치가 극에 달한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 것이 바로 강화 도령철종이 왕위에 오른 사건이다. 글도 모르고 천민과 다름없이 생활한 왕족으로 골라 왕으로 내세운 것이다. 심지어 차기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왕족들 중에서 재주가 뛰어나거나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은 어떤 누명을 씌워서라도 죽일 정도로 세도 정치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세도 정치 아래에서 숨죽여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자신의 아들인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정권을 잡은 흥선 대원군이 외척이라면 치를 떤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흥선 대원군은 조선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다시는 외척이 국정에 관여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힘없는 가문에서 며느릿감을 찾았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며느리가 바로 명성황후였던 것이다.

 

 

3. 국정에 깊이 관여한 왕비

 

그러나 흥선 대원군의 예상과는 달리 명성황후는 훗날 흥선 대원군의 최대의 정적이 될 정도로 국정에 깊이 관여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세상을 떠난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 근처에 있다가,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으로 함께 합장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명성황후탄강구리비

 

 

 

명성황후 생가 오른쪽에는 작은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비이라고 새겨진 비석을 보관하고 있다. 이 비석은 1904년에 세워졌는데,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녀의 고향 집에 세운 것이다. ‘탄강은 왕이나 성인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이고 구리는 고향이라는 뜻이다. 비석 뒷면의 글씨는 명성황후의 아들이자 제27대 임금인 순종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 민유중 신도비

 

 

 

 

비각 오른쪽으로 가면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도 남아 있다. ‘신도비란 묘로 가는 길목에 세우는 임금이나 뛰어난 신하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신도비에는 민유중의 업적을 소개하고 그를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비석을 지탱하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이 매우 아름답다. 머리 부분이 화려한 용의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용이 묘소를 향하여 머리를 오른쪽으로 틀고 있는 것이 아주 독특하다.

 

 

 

▲ 감고당 전경

 

 

 

소박한 명성황후 생가에 비해 주변은 성역화 작업으로 매우 넓게 잘 정돈되어 있다.

 

생가의 왼쪽으로는 감고당이라는 집도 남아 있는데, 이 집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1667~1701)가 장희빈과 갈등을 겪다가 폐비의 신분이 되어 다시 복위될 때까지 약 5년 동안 지냈던 집이다.

 

이 집은 본래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 있었지만 1966년에 쌍문동으로 옮겨졌다가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다시 2006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생가에서 태어나 8살 때까지 살았던 명성황후가 한양으로 올라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집이기도 하다. 1761년에 영조가 인현왕후를 기려서 감고당이란 편액을 내려 이름이 붙여졌다.

 

명성황후 생가 맞은편에는 명성황후 기념관이라는 커다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명성황후와 관련된 유물, 을미사변과 명성황후가 살았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알려 주는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 명성황후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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