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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선의 왕릉, 선정릉(선릉과 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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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릉의 정자각

 

 

 

서울시 강남구에는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하고 고층빌딩이 많기로 소문난 테헤란로라는 대로가 하나 있다.

이 대로의 원래 이름은 근처의 선정릉에 3개의 왕릉이 있다고 하여 삼릉로(三陵路)’였다. 그러다가 1977년에 이란의 테헤란 시장이 서울시를 방문하게 되었고 서울시와 테헤란시의 우의를 다짐하기 위해 서울에는 테헤란로, 테헤란에는 서울로라는 이름의 도로명이 만들어졌다. 이때 삼릉로라는 이름이 오늘날처럼 테헤란로가 된 것이다.

 

 

강남구를 남북으로 크게 가로지르며 뻗어 있는 이 테헤란로 가운데 지하철 선릉역 부근에 있는 선릉과 정릉은 마치 빌딩 숲속에 둘러싸인 녹색의 정원처럼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선릉과 정릉, 합쳐서 흔히 선정릉이라고 부르는 조선의 왕릉은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 내려서 불과 3분 거리에 있다.

 

 

 

우선 선릉(宣陵)은 조선의 제9대 임금인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고, 정릉(靖陵)11대 임금인 중종의 무덤이다. 두 왕릉의 이름을 합쳐 선정릉(宣靖陵)’이라고도 부르고, 또는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이 각각 따로 있기에 총 3개의 왕릉이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이라고도 부른다. 선정릉은 사적 제199호에 지정되어 있는데 선정릉을 줄여서 그냥 선릉이라고도 부른다.

 

 

▲ 선릉 능침에서 바라본 전경. 인근 테헤란로의 고층 빌딩 속에서 푸른 녹지가 더 돋보인다.

 

 

 

먼저 1495년에 성종의 능인 선릉이 만들어졌고, 그 뒤 1530년에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선릉의 바로 동쪽에 안장되었다. 선릉처럼 하나의 정자각 뒤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좌우 두 언덕에 각각 따로 두는 경우를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고 한다. 같은 능역 안에 있으면서 언덕을 달리하였다는 뜻이다.

 

 

▲ 선릉(성종의 무덤)

 

▲ 선릉(정현왕후의 무덤) 

 

 

▲ 정릉(중종의 무덤)의 전경

 

 

 

 

11대 임금 중종의 무덤인 정릉은 1544년에 중종이 승하하자 처음에는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 안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중종의 제2계비이자 당시에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던 문정왕후는 1562년에 중종의 무덤을 현재의 위치인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훗날 자신이 죽으면 중종의 옆에 묻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문정왕후는 불교에 심취하여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던 조선왕조의 기조와 달리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선정릉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봉은사의 주지인 승려 보우를 크게 신임하여 가까이하였다.

 

지금의 서삼릉 안에 조성되었던 중종의 무덤은 지대가 낮아 해마다 비가 많이 오면 재실까지 물이 차는 등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이에 보우가 건의하여 그가 주지로 있던 봉은사에서 가까운 오늘날의 선정릉 자리로 무덤을 이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정왕후는 사후에 선정릉에 묻히지 못하였다. 이장한 정릉 자리도 풍수상 좋지 못하다는 의견이 있었고, 이곳도 장마 때면 홍살문에까지 물이 차는 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정왕후의 아들이자 제13대 임금인 명종의 명에 따라 그녀의 생전 바람과 달리 남편(중종)과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현재 위치인 서울시 노원구 태릉에 홀로 안장되었다.

 

 

선정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 가장 큰 수난을 겪은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을 점령한 왜군이 이곳 선정릉의 무덤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때 선릉과 정릉의 봉분이 모두 훼손되어 시신이 없어졌다고 한다. 다만 중종의 무덤 근처에서만 하나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중종의 시신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선정릉 근처에 따로 모셨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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