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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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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아리랑로19116)에 위치한 정릉(貞陵)은 조선 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 왕후 강씨의 무덤으로 사적 제288호에 지정되어 있다.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정릉에 있는 정릉(靖陵)은 이름이 같지만 11대 임금 중종의 무덤이다.)

 

 

 

조선을 개국하기 전,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풍습에 따라 향처와 경처를 각각 두었다. 향처는 고향의 부인이란 뜻으로 함흥에 있는 신의왕후 한씨였고, 경처는 당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부인으로 바로 신덕왕후 강씨가 이성계의 경처였다.

 

 

 

신덕왕후 강씨는 고려말 황해도 지방의 권문세가였던 강윤성의 딸로, 쉽게 말해 강씨의 가문은 고려 말의 권문세가였다. 자연히 신덕왕후의 든든한 집안은 남편인 이성계가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 영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고, 신덕왕후는 남편인 이성계가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성계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르기 전인 1391(고려 공양왕 3)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덕왕후는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조선의 개국은 1392)

 

 

 

정자각에서 바라본 능침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와 첫째 부인 신의왕후 사이에 낳은 여섯 아들을 제치고 자신이 낳은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만큼 당시 신덕왕후의 위세와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또한 태조도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했다고 한다.

 

 

태조 5년인 1396년에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처음에는 안암동에 능지를 정하려 했으나 물이 솟아 나와 도성 안인 지금의 덕수궁 근처(현 영국대사관 근처) 정동에 무덤을 만들었다.

 

정동과 정릉에 관한 이야기는 아래 포스팅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 조선의 궁궐, 덕수궁   https://sasavi.tistory.com/75

 

 

 

다시 말해 정릉은 처음에 현재의 정릉동이 아닌 서울의 한복판인 정동에 있었던 것이다. 정동이라는 이름도 정릉이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유래된 지명이다. 무덤이라도 가까이 두고 싶었던 태조 이성계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태조는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근처에 흥천사라는 절까지 세웠다.

 

 

 

 

▲ 홍살문과 참도 | 다른 왕릉과는 달리 정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가 일직선이 아니라 기역(ㄱ)자로 꺾여 있다.

 

 

 

 

 

그러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이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고 3대 왕에 오르자, 정릉은 수난을 겪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을 현재 위치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렸다.

 

 

태종(이방원)은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의 아들이었고, 조선 왕조 개국에 큰 몫을 한 자신을 제치고 여덟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앉혔기 때문에 신의왕후 강씨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심지어 태종은 무덤을 옮긴 후 정릉에 있던 정자각을 허물어 일부 자재는 중국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을 짓는 데 쓰도록 하였고, 석물은 모두 땅에 묻어버린 데다가 정릉의 병풍석을 뜯어 청계천 광통교에 사용하였다. 또한 신덕왕후의 신주도 종묘에서 빼버리는 등 왕비가 아닌 후궁의 신분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그 후 수백 년이 흐르는 마치 주인 없는 무덤처럼 방치되었던 정릉은 1669(현종 10)에 이르러 송시열 등의 건의로 비로소 왕비의 신분을 되찾고 신위를 다시 종묘에 모시게 되었으며, 이때 묘역도 정비하게 되었다.

1899년에 당시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추존하면서 재실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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