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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병자호란의 치욕을 간직한,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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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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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렬전 | 남한산성에 있는 사당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경기도 광주시와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에는 조선 시대에 도읍인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산성이 있다. 바로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는 남한산성이다.

 

 

 

본래 남한산성이 있는 이곳 남한산에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만든 성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신라 문무왕 때에 만든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이라는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주장성이 바로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 시대의 기록은 없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일장산성이라는 기록이 있다. , 남한산성은 이러한 과거의 여러 성의 터를 바탕으로 조선 인조 때에 본격적으로 쌓은 산성이다.

 

 

▲ 남한산성 행궁 | 행궁이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했을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이다. 조선 시대에는 전국 주요 지역에 행궁을 세우고 임금이 지방으로 행차했을 때 처소로 사용하거나 전란이 발생했을 때 피난처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 시기는 이괄의 난을 겪은 후인 인조 2(1624)이다. 남한산성은 도성 북쪽의 북한산성과 더불어 한양 도성을 남과 북으로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성곽이었다.

 

 

험준한 산의 지세를 따라 성곽을 쌓았고 각종 군사 시설은 물론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임시 수도의 역할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설도 만들어 놓았다.

 

임금이 비상시에 머물수 있도록 만든 남한산성 행궁에는 다른 지역의 행궁과는 달리 종묘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사직단에 해당하는 우실(右室)까지 갖추었다.

 

 

▲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 인조는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이 문으로 성을 빠져나갔다.

 

 

▲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남한산성이 오늘날과 같이 널리 알려지게 된 까닭은, 바로 이곳이 병자호란의 아픔과 치욕스러운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조 14년인 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이곳으로 급하게 피신하였다. 당시 한반도 북쪽 만주 전역을 차지하며 명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을 떨치던 후금은 황제의 나라를 표방하며 국호를 으로 고치고 조선에 신하국으로서의 예를 강요하였다.

 

전통적으로 명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이 이러한 요구를 묵살하자, 마침내 청나라 태종은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였다. 의주부윤 임경업이 백마산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청나라 군은 이를 피해 한양으로 곧장 향하였고 인조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은 부랴부랴 강화도로 피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청나라 군이 강화도로 향하는 길을 막자 어쩔 수 없이 인조는 소현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 남한산성 수어장대 | 오늘날 남한산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장대란 장수가 성 안의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하여 높은 곳에 지은 건물로, 수어장대는 1624년에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에 지은 4개의 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로 남한산성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바깥쪽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안쪽에는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무망루(無忘樓)’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현재는 무망루 현판만 따로 수어장대 옆에 비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곧 청나라 군대에 완전히 포위되었고, 혹독한 추위와 식량 부족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조정과 군사들은 47일간이나 버텼다. 그러나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과 왕자들이 피신했던 강화도마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침내 인조와 조정은 항복을 결심하였다.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 서문으로 빠져나와 지금의 잠실역 석촌호수 근처인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항복을 받아들이는 제단)에서 기다리던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항복의 예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불리는 역사적 사건이다.

 

​​암문 | 암문이란 이름 그대로 적의 눈을 피해 성 안팎을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비밀스러운 문이다. 남한산성에는 현재 16개 정도의 크고 작은 암문이 남아 있다.

 

 

​▲ 연무관 | 연무관은 군사들이 무술을 닦는 곳으로, 처음에 연무당이라고 부르던 것을 정조 때에 수어영이라고 부르다가 그 후로 연무관이 되었다. 남한산성 행궁 동쪽에 있으며, 단층에 팔작지붕을 가진 목조 건물이다.

 

 

 

 

남한산성은 둘레가 12킬로미터에 달하며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비상시에는 임시 수도로서 기능도 할 수 있도록 종묘와 사직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산성 가운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며 삼국 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축성 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남한산성은 그 역사적 가치와 의의, 축성 기술 등을 높이 평가받아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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