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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선 왕조의 으뜸 궁궐,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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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제일 궁궐인 경복궁

▲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 광화문과 해태상

 

 

 조선왕조의 도읍지였던 서울에는 오늘날에도 그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그곳에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다지기 위하여 궁궐을 지었다. 이곳이 바로 경복궁이다.

  ‘큰 복을 누리다.’라는 뜻을 가진 경복궁(景福宮)은 조선 왕조를 대표하는 제일의 궁궐로, 600년 이상의 역사와 함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궁궐 안의 여러 건물들은 왕이 머무르는 공간인 만큼 당시에 나라에서 으뜸가는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경복궁 안의 여러 건물들은 크게 왕과 신하들이 나랏일을 보는 공간과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즐기는 후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건물들은 모두 매우 짜임새 있게 계획되어 지어졌는데,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정전), 사정전(편전), 강녕전(침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였고, 이에 딸린 부속 건물들이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놓였다. 궁궐의 둘레에는 네모반듯하게 성벽을 쌓고,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문을 만들어 놓았다.

 

 

▲ 경복궁의 정전(궁궐의 으뜸 가는 중심 건물)인 근정전 |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이 거행된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1395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타 사라지고 현재의 것은 고종 때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2. 가장 중요한 건물, 근정전 

 

  오늘날 서울의 중심에는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는 광화문 광장이 있다. 이 광장에 자리 잡고 있는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조선 시대 궁궐의 모든 문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해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해태는 상상 속의 신성한 동물로, 재앙이나 화재를 물리치기 위하여 광화문 앞에 세운 것이다.

   경복궁의 여러 건물을 대표하는 중심 건물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근정전이다. 근정전에서는 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거나, 왕의 즉위식과 같은 나라의 큰 행사가 열렸다. 또한 이곳에서 외국의 사신을 맞기도 하였으므로 다른 어떤 건물보다 그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근정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신하들의 위치를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표시한 품계석도 있다. 

 

 

 

▲ 강녕전 |  경복궁의 내전(內殿)으로 왕이 일상을 보냈던 침전이다.

 

▲ 교태전 |  경복궁의 내전(內殿)으로 왕비가 거처하였던 침전이다. 중궁 또는 중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 경회루 |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로 손꼽히며,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작은 누각이었으나 태종 때에 연못을 확장하고 큰 규모로 중건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3. 가장 아름다운 경회루

 

  역시 국보에 지정되어 있는 경회루는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나라에 큰 경사가 있거나 외국의 사신이 왔을 때에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이기도 하다. 특히 경회루 2층에서 바라본 주변 경관은 누구나 감탄할 만큼 빼어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경복궁이 가장 활기에 찼던 시절은 제4대 왕인 세종 때이다. 세종은 현재의 수정전 자리에 있던 집현전을 중심으로 우수한 인재들로 하여금 각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며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여러 가지 기술과 제도를 만들었다.  

 

 

 

 

▲ 집옥재 |  고종 때에 서재로 사용하던 건물로,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인 신무문 근처에 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종 10년인 1873년 무렵 건청궁을 지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 안의 다른 건물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신식인 중국풍과 서양식 건축 양식이 반영되었다.

 

▲ 건천궁 일대 |  왕과 왕비의 거처 및 외교관의 접대 장소로 지어진 곳으로 경복궁 안의 작은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 1873년 고종 10년에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에 완성되었다. 1887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기 설비가 세워진 곳이며, 1895년 을미사변 때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이기도 하다.

 

▲ 건춘문 |  경복궁의 동쪽 대문으로, 建春門이란 이름 그대로 봄을 세운다는 뜻이다. 세종 때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짓게 하여 오늘날처럼 건춘문이란 이름이 붙었고, 이름에 봄 春자가 들어간 곳은 오행에서 동쪽을 상징하는 계절이 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경복궁의 서쪽 대문인 영추문(迎秋門)에 가을 秋자가 들어가는 것은 오행에서 서쪽을 상징하는 계절이 가을이기 때문이다. 

 

 

4. 수난의 역사를 지닌 궁궐

 

  이렇듯 조선 왕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복궁은 사실 오랜 역사 속에서 시련을 많이 겪은 궁궐이기도 하다. 조선의 제일 궁궐이지만 실제로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궁궐은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이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정적으로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으로 인해 궁궐 전체가 불에 타버렸기 때문이다. 그후 조선 말기인 19세기 후반 고종 때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다시 짓기까지 300년 가까이 폐허처럼 남아 있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은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다시 지었다(경복궁 중건). 그러나 명성황후가 경복궁 안의 건청궁에서 살해되고,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면서 경복궁은 크게 훼손되어 제 모습을 잃어버렸다.

 

  정부에서는 1990년부터 경복궁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경복궁 안에 지어져 있던 조선 총독부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였고, 최근에는 광화문을 비롯하여 건청궁, 태원전, 흥례문, 영제교 등의 주요 건물과 문, 다리가 복원되었다. 

 

 

▲ 6.25 직후의 경복궁 일대

 

▲ 일제 강점기에 일장기가 걸려 있는 근정전

 

▲ 조선 총독부 건물 |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면서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세운 관청 건물로서, 일제 강점기인 1926년 경복궁 안에 완공되었다. 광복 후에는 정부 청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가 1996년에 철거되었다. 

 

▲ 향원정  |  경복궁 안에 있는 누각으로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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