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성대 공원에 우뚝 솟아 있는 강감찬 장군 동상
1. '고려의 영웅' 강감찬은 어떤 인물인가?
서울시 관악구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근처에 있는 낙성대는 고려 시대의 명장인 강감찬 장군(948~1031)이 태어났다고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는 강감찬 장군의 사당(안국사)와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보통 낙성대라고 하면 이 사당인 안국사를 가리키기도 하고 이 일대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라는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강감찬 장군은 고려 초기에 거란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한 민족의 영웅이다. 거란이 수십 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그는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용감히 싸웠다. 이때 살아남은 거란의 병사가 불과 수천 명에 불과할 정도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승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귀주대첩'이다. 그는 생전에 명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재상으로서도 큰 공을 세웠기에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와 관련된 다양한 설화가 전해진다. 역사 속 실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화 속 주인공처럼 영웅시되었다.
▲ 홍살문 | 붉은색 살이 있는 문으로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려 준다. 보통 홍살문은 사당이나 향교, 왕족의 무덤 등에 세워진다.
▲ 안국문 | 안국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문이다.
그는 고려 초기인 948년 금주(衿州)에서 태어났는데 이때는 고려의 제3대 왕인 정종(945~949) 때이다. 금주는 오늘날 서울시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관악구와 금천구 일대였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여러 호족 세력과 연합하였는데, 강감찬 집안은 대대로 이곳 금주에 자리잡은 세력이었다. 특히 강감찬의 부친인 강궁진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쉽게 말해 강감찬은 개국공신 집안에서 태어난 셈이다.
강감찬의 탄생 설화는 영웅 신화와 닮아 있다. 어느 날 외국의 사신이 밤중에 큰 별이 어떤 집으로 떨어지는 곳을 보고 그 집을 찾아가보니 마침 그 집에서 한 아이가 막 태어났다고 한다. 바로 그 아이가 강감찬이었고, 태어난 집터가 바로 낙성대라는 것이다.
강감찬의 어린 시절 이름(아명)은 '은천'이었다. 그리고 훗날 강감찬에게 붙여진 시호가 '인헌공'이다. 때문에 지금도 관악구 곳곳에는 '은천'이나 '인헌'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2. 명장 강감찬이 태어난 낙성대
▲ 안국사 |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 낙성대 삼층석탑
오늘날 강감찬은 우리 역사에서 을지문덕, 이순신과 함께 3대 명장으로 꼽히지만, 사실 일생을 무관이 아닌 문관으로 지냈다. 관직에 오른 것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올랐고 정식으로 무관으로 임명받은 적도 없다. 그러나 1018년 12월,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고려의 총사령관이 되어 고려군을 이끌고 귀주에서 대승리를 거둔 것이다.
거란의 장수 소배압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강감찬은 고려군을 이끌고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공격하는 방법으로 거란군을 공격했다. 거란군과 고려군은 마침내 귀주에서 만나 최후의 결전을 벌였는데, 강감찬의 고려군은 나중에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간 거란군이 10만 명 중 수천 명에 불과할 정도로 거의 궤멸시켰다. 적장 소배압은 갑옷을 버리고 겨우 압록강을 헤엄쳐 건너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 이에 거란의 왕은 소배압에게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여 버리겠다.'고 할 정도로 대노했다고 한다.
이처럼 대승을 거두고 고려의 운명을 일으켜 세운 강감찬은 전쟁 후에도 외침에 대비하여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그가 84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당시 고려의 왕인 덕종은 3일간 조회를 열지 않고 국상을 치르도록 하였다.
고려의 백성들은 강감찬 장군의 공적을 기르기 위하여 장군이 태어난 집터에 3층 석탑을 세워 놓았다. 지금도 낙성대 안국사 앞에 남아 있는 석탑이 바로 그것인데, 탑신에는 ‘강감찬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고 새겨진 글자가 뚜렷이 남아 있다.
1973년, 서울시에서는 이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후에 사당(안국사)과 부속 건물들을 세우고 주변에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이때 안국사를 비롯하여 안국문이 세워졌다. 현재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안국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가진 건물인데, 고려 시대의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부석사 무량수전을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 강감찬 장군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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