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현장
혹시 이런 말을 들어봤는가?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적 사건,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기억되는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6월 항쟁)의 출발점이 된 사건을 단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그 사건은 바로 '故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다.
이 사건은 2017년 개봉했던 영화 <1987>의 모티브이기도 하며, 당시 군부 정권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사건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1979년 말부터 1980년 초에 걸쳐 12.12 쿠데타 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하며 정권을 잡은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전두환의 7년 임기가 끝날 무렵이 되자 정권 연장을 꿈꾼다.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6월 민주화 운동은 국민에 의한 선거 없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던 군부 독재 시대를 마감하고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는데, 바로 그해 6월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이 이 사건이다.
1987년, 박종철 군은 당시에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었다. 그는 1987년 1월 14일, 당시에 시국 사건으로 수배 중이었던 선배 박종운을 쫓던 경찰에게 연행되어 바로 이곳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에 있는 대공분실로 끌려왔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온갖 고문을 가하며 선배인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다. 결국 박종철은 물고문을 받던 중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숨졌다.
이에 경찰은 서둘러 박종철의 시신을 화장하고 고문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언론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자 경찰은 이렇게 발표한 것이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억’ 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졌다. 급히 중앙대학교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사체를 검안했던 병원 의사가 고문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사건은 물고문으로 인한 질식사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2. 놀라운 건물 구조
이와 같이 남영동 대공분실은 군부 독재 시절에 수많은 비인간적인 불법 고문이 자행되던 장소이다. 대공분실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공(對共)’ 즉, 공산주의자나 간첩을 체포하여 조사하기 위해 만든 곳인데, 실제로 군부 독재 시절의 대공분실은 시위하는 대학생들이나 골치 아픈 민주화 인사들에게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잡아다가 고문하는 데 쓰였던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이름없는 민주화 인사와 대학생들이 빨갱이로 몰려 잔인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바로 이 구 남영동 대공분실을 만든 사람이 바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로 손꼽히는 김수근이란 사실이다. 우리나라 현대 건축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수근은 ‘공간 사옥’과 잠실에 있는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을 비롯하여 부여 국립 박물관, 남산 자유센터, 국립과학관, 경동교회 등을 설계하였는데, 유독 건축물에 거무스름한 벽돌을 많이 사용하였다.
구 남영동 대공분실도 검은 잿빛의 벽돌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사실 무겁고 장중해 보이는 건물 외관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내부 구조이다.
건물의 내부 구조는 이곳에 잡혀온 사람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그리고 5층에 있는 조사실은 한마디로 피의자를 24시간 내내 감시하면서 고문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우선 이곳으로 끌려온 사람(피의자)은 검푸른 철문을 통과하여 건물 뒤편으로 가게 된다. 건물 뒤편에 있는 출입문은 들어가는 방향과 나오는 방향이 서로 반대로 되어 있다.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1층부터 5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나선형의 철로 된 계단이 나타난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피의자는 자신이 몇 층에 있는지 알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나선형의 계단을 통해 피의자들은 주로 고문을 받는 5층 조사실로 향하게 된다. 5층에는 여러 개의 조사실이 있는데 각 조사실의 문이 다른 조사실의 문과 모양도 같고 위치는 서로 마주보지 않도록 엇갈려 있다. 이렇게 되면 피의자가 어디로 들어왔고, 나가는 곳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각각의 조사실에는 아주 좁고 기다란 창문이 나 있으며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창문은 너무 좁아서 조사를 받던 피의자가 고문에 못이겨 뛰어내릴 수 없도록 만들었고, 밖을 제대로 볼 수도 없다.
취조실의 전등은 밖에서만 끄고 켤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문에 렌즈가 달려 있다. 취조실 안에는 욕조와 침대, 변기, 고정된 의자와 책상 등이 있는데, 특히 욕조는 몸을 씻기 위한 용도로는 너무 폭이 좁은 데 비해 깊이는 제법 되어서 다른 용도(주로 물고문)로 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 갇힌 피의자들은 변호인 접견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조차 지켜지지 않은 상태로 24시간 감시받으며 수시로 고문을 받았다.
3. 역사의 교훈, 인권의 소중함
이 건물은 1976년에 경찰청 산하의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지어졌다. 물론 일반인에게는 그 존재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로 비밀리에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 김근태 의원 고문 사건으로 언론에 그 실체가 드러났고,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91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경찰철 보안분실로 바뀌었다가 지난 2005년에는 이곳에 경찰청 인권 센터가 들어섰다. 현재는 박종철 기념 전시실과 인권교육 자료실이 들어서면서 인권의 소중함을 알리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봉건 시대에 툭하면 역모를 꾀한다는 이유로 상대 당파를 숙청하고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처럼 군사 독재 시절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선량한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이와 같이 고문하고 억압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곤 했다.
구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지하철 1호선 남영역 바로 근처에 있으며,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도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 주말을 제외한 평일에는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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