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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미술가

황금빛 여인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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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907년)

 

 

 

 

클림트는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에게 그리 친숙한 화가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화가가 되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몇 해 전에 그의 대표작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이 유명한 두통약의 포장지에 실려 대대적으로 광고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매우 신비스러우면서도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작품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화려함그 자체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신화 속 인물이 자주 등장하며, 꿈과 상상의 세계, 생명과 죽음, 여인과 사랑 등의 추상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아마도 오스트리아의 화가로서는 가장 유명한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 근처에 있는 바움가르템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판화가이자 금세공업자였는데, 수입이 넉넉지 않아 집안은 늘 가난에 시달렸다. 클림트는 일찍부터 미술 학교에 들어가 회화와 장식 공예를 공부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주로 공공건물의 벽화나 장식물을 만드는 일을 했다.

 

 

클림트의 작품 세계를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아르 누보이다. 아르 누보(Art Nouveau)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예술이란 뜻이다.

 

19세기에 말인 1890년대부터 20세기 초인 1910년대에 걸쳐서 유럽에서는 아르 누보의 물결이 퍼지고 있었는데, 그 말처럼 새로운 세기가 펼쳐지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기존의 예술 형식을 거부하고 전혀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추구하자는 운동이었다.

 

 

 

▲ <에밀리 플뢰게> (1902년)

 

 

 

아르 누보는 유럽의 각국은 물론 바다 건너 영국과 미국 등에서도 유행했는데, 각 나라마다 조금씩 명칭과 경향이 다르게 나타났다. 그래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사조이기도 하다. 다만 아르 누보는 주로 공예품과 실내 장식 분야에서 크게 발달하였다.

 

 

클림트는 처음에는 인상파에 관심을 가졌고 특별한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24살 때인 1886년에는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기 위해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초상화를 그렸는데,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섬세하여 극찬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른 살 무렵부터 아르 누보와 같은 새로운 미술 혁신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당시에 오스트리아의 빈에는 클림트처럼 전통적인 미술 형식에 반감을 갖고 새로운 미술 혁신 운동에 관심을 가진 젊은 화가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1897년에 클림트를 회장으로 하여 오스트리아 미술가 연합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훗날 ‘빈 분리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빈 분리파는 보수적인 미술계의 관행을 깨고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는 외국 작가들과 교류하며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열기 시작했다.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말을 내세우면서 예술의 전통적 가치에만 매달려 있는 기존의 예술 방식에 맞섰다.

 

 

1898년에 열린 첫 번째 전시회에서 프랑스의 조각가인 로댕을 비롯하여 독일의 아르 누보 운동을 추구하는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빈 분리파는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잡지, 그리고 음악까지 모든 예술 분야에 걸쳐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회화는 물론 식기와 장신구, 건축물, 가구, 카펫 등 순수 미술은 물론이고 응용 미술까지 아울러 종합 예술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빈 분리파는 1905년 무렵부터 응용 미술을 중요시한 클림트와 순수 미술을 강조한 다른 그룹이 갈라지면서 서서히 힘을 잃고 사라져 갔다.

 

 

 

▲ <성취> (1905년~1909년)

 

▲ <키스> (1907년~1908년)

 

 

 

 

빈 분리파에서 탈퇴한 클림트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로 여성과 성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는 너무 자극적이다.’, ‘에로티시즘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여성의 관능적인 이미지와 화려한 황금빛 색채, 그리고 부드러운 곡선 등을 특징으로 한 작품 세계를 펼쳤다.

 

 

 

▲ <희망 II> (1907년~1908년)

 

 

▲ <유디트 II(살로메)> (1909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큰 명성을 얻었지만, 동시에 너무 외설적이란 평가도 받으며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여인과 교제했고, 1918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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