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화상>
아마도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는 <시녀들>이란 작품으로 유명한 벨라스케스(1599~1660)와 함께 에스파냐(스페인)의 화가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그는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남겼는데 특히 인물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와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한 역사화로 유명하다. 평생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친 그는 7백 여점에 이르는 그림을 비롯하여 수백 점의 판화도 남겼다.
1746년 에스파냐의 한 작은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우며 화가로서의 재능을 닦았다.
고야는 24살 때인 1770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로마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는 로마에서 고대 로마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영향을 받았고, 몇 년 후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와서 마드리드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펼쳤는데, 스스로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드리드 궁전을 장식할 그림을 그리던 고야는 1780년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 <파라솔>
고야는 이 무렵부터 초상화를 잘 그리는 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왕족이나 귀족, 부자들은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기 시작했고 고야는 경제적인 여유와 명성을 얻었다.
43살이 되던 1789년에 고야는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당시에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화가로서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고야는 궁정화가로서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 <옷 벗은 마하> | 1800년경
▲ <옷 입은 마하> | 1805년경
고야는 점차 과거의 낡은 관습과 오래된 미신을 타파하려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유롭고 파격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옷 벗은 마하>이다.
서서히 계몽주의가 퍼지기 시작했지만 당시만 해도 에스파냐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종교(가톨릭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누드화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훗날 종교재판까지 받고 궁정화가 지위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고야는 1799년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다. 고야의 또 다른 대표작인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은 이 무렵 그린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인 <시녀들>과 상당히 유사한데, 그림 왼쪽을 보면 커다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 즉 고야 자신의 모습이 있다.
▲<마누엘 고도이의 초상화>
▲ <투우>
고야가 활동했던 시대는 에스파냐는 물론 전 유럽에서 커다란 역사적 변화가 일어난 ‘격변의 시대’였다.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시민들에 의한 혁명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우려는 시민들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귀족, 혹은 왕족 세력 사이에 끊임없이 충돌이 일어났다.
특히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은 에스파냐까지 밀려 들어와, 19세기 초에는 프랑스 군대가 에스파냐를 점령하여 나폴레옹의 형인 조세프가 에스파냐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에스파냐 사람들은 처음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부패한 에스파냐 왕정을 깨부수고 새로운 민중의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프랑스군은 야만적인 지배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에스파냐에서는 침략자인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쟁이 오랫동안 펼쳐졌다.
▲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고야가 그린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은 오늘날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에스파냐에서 저지른 야만적인 학살을 고발한 그림이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의 시민들은 프랑스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는데, 프랑스군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다음날인 5월 3일 수많은 마드리드 시민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이때부터 고야의 그림에는 어둡고 암담한 분위기가 반영되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가지 판화와 그림을 통해 폭력과 광기, 살육 등의 모습을 담았는데, 이 무렵에 그린 고야의 작품들을 ‘검은 그림(Black Paintings)’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작품들에는 당시 에스파냐의 복잡한 내전으로 암울했던 시대상과 고야의 정치적 의식이 담겨 있다.
▲ ‘검은 그림’ 중 하나인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말년의 고야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피해 프랑스의 파리와 보르도로 옮겨 다녔다. 그리고 보르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은 고야를 가리켜 로코코 양식의 화가나 낭만주의 화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가 궁정화가로서 남긴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는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훗날 전 유럽에 유행하는 사실주의나 인상주의의 경향도 엿보이며, 심지어 상징주의의 특징까지 나타나 있다.
고야는 특정한 예술적인 흐름이나 양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 가지 특징만으로는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 차라리 시대를 앞서갔던 ‘가장 근대적인 화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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