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
열정의 보헤미안, 고독한 영혼을 표현한 화가,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화가,
모가지가 길어 슬픈 에콜 드 파리의 위대한 화가,
몽파르나스의 전설 …….
이렇게 모딜리아니의 작품과 일생을 다룬 다양한 책과 영화, 뮤지컬 등의 제목만 쭉 살펴보아도 그가 어떤 화가였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는 ‘파리의 학교’란 뜻으로, 주로 제1차 세계 대전 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나 몽마르트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여러 외국인 화가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파리파’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국적을 떠나 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모여 작품 활동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모딜리아니(이탈리아), 수틴(리투아니아), 파스킨(불가리아), 샤갈(러시아), 자크(폴란드) 등의 화가를 꼽을 수 있다. 넓게 보면 피카소(스페인)도 포함된다. 이들은 일정한 사조나 표현 형식에 얽매인 집단이 아니었고 각자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 세계를 펼쳤다.
이렇게 미술의 역사에서 혁명적인 변화와 새로운 물결이 넘실대던 20세기 초에 모딜리아니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화가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능을 펼치던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한 화가 중 하나였다.
▲ <폴 기욤의 초상화> (1915년)
▲ <파블로 피카소의 초상화> (1915년) | 당시 34살의 젊은 화가였던 피카소를 그린 작품이다.
모딜리아니는 1884년에 이탈리아의 리보르노에서 유태계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때 성공한 은행가였지만 모딜리아니가 태어날 무렵에는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 그래서 모딜리아니의 집안은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모딜리아니는 14살 때부터 미술을 공부하였고, 피렌체와 베니스 등에서 미술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22살 때인 1906년에 파리의 몽파르나스로 이주하였다.
당시에 파리의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 지역은 화가들이 특히 많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어머니가 보내오는 적은 생활비와 간간히 작품을 팔아 버는 돈을 합쳐 어렵게 생활을 꾸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는 거의 무명 화가였으므로 그림을 팔아서 돈을 벌지는 못했다.
1908년, 모딜리아니는 처음으로 앙데팡당(independent)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앙데팡당은 신인상주의와 점묘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1859~1891)와 폴 시냐크(1863~1935)가 만든 단체였다. 앙데팡당 전시회는 19세기 말부터 살롱의 엄격한 심사와 보수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신진 작가들을 알리기 위해 매년 개최된 미술 전시회로, 살롱과 달리 심사를 받지 않고 출품과 전시가 가능했다.
앙데팡당은 전시회를 통해 젊고 진보적인 많은 화가들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세잔, 마티스, 로트레크, 반 고흐, 샤갈, 모딜리아니 등 인상파 이후의 훌륭한 화가들이 앙데팡당 전시회를 거쳐 자신들의 작품을 세상에 알렸다.
▲ <장 콕토의 초상화> (1916년)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였으며, 점차 독특한 화풍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중의 인정을 받지는 못해 항상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개인전을 열어도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실패하기 일쑤였다.
파리에 정착한 지 4~5년이 지났지만 화가로서 그는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이 때문에 한때 조각으로 눈을 돌려 약 3년 정도 조각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결핵에 걸려 쇠약했던 그는 돌을 쪼개며 먼지를 마셔야 하는 고된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조각에 필요한 비싼 재료비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모딜리아니는 조각을 완전히 포기하고 다시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 <잔 에뷔테른> (1918년)
조각을 포기하고 다시 붓을 든 이후로 모딜리아니의 화풍은 이전보다 더욱 더 간결해지고 개성이 넘쳤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풍경화는 거의 없고 대부분 인물을 그린 초상화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초상화와는 많이 다르다.
특히 달걀처럼 생긴 타원형의 긴 얼굴과 사슴처럼 가늘고 길게 늘어진 목,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 아몬드처럼 생겨 초점 없는 눈 등이 특징이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여인의 얼굴, 그리고 여인의 누드화를 즐겨 그렸다.
▲ 잔 에뷔테른의 실제 모습(사진)
▲ <잔 에뷔테른의 초상화> (1918년)
▲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1918~1919년)
보기 드문 미남이었던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많은 여인들을 사귀었다. 가난한 경제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결핵을 앓아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 가난하고 방탕한 생활이 이어지자 건강은 더욱 더 악화되어 갔다.
모딜리아니는 1917년부터 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을 뒤로 하고 잔 에뷔테른이라는 여인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잔 에뷔테른은 그림을 공부하며 화가들의 그림 모델을 하던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화가와 모델로서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잔 에뷔테른의 부모는 두 사람 사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1918년 딸을 낳았지만,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점차 나빠졌다. 그리고 1920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한 자선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잔 에뷔테른은 임신 중이었는데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난 바로 다음날 건물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 <아기를 안고 있는 집시 여인> (1919년)
▲ <부채를 든 여인> (1919년)
불과 36살의 짧지만 열정적인 삶을 살다 간 모딜리아니의 삶은 훗날 여러 차례 영화와 소설, 연극, 뮤지컬 등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비록 생전에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 화가였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평판은 올라갔다. 오늘날 모딜리아니는 미술의 역사를 통틀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만들어 낸 몇 안 되는 뛰어난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 <자화상>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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