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 삼랑성 동문 | 무지개처럼 돌로 쌓은 홍예문 형식으로, 문루는 없다.
인천광역시에 속한 강화도에는 선사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지석묘)을 비롯하여 고려의 왕궁 터인 고려궁지, 몽골의 침략에 대비해 쌓았다는 강화산성, 강화도령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 초지진을 비롯한 조선 시대의 여러 군사시설 등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또한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과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는데, 마니산 참성단(사적 제136호)과 삼랑성이 그것이다.
특히 사적 제130호인 ‘강화 삼랑성’은 단군왕검의 세 아들, 즉 삼랑(三郞)이 쌓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어 삼랑성(三郞城)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삼랑산성(三郞山城)’ 또는 정족산에 있는 산성이라고 하여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처음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성곽을 만든 양식을 보면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가 훗날 자연석으로 쌓은 흔적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인 1259년에 성안에 궁궐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고려 시대 이전에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강화 삼랑성 성곽
그 후 조선 영조 때인 1739년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성안에는 고구려 때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절인 전등사가 있고, 1660년(헌종 1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마니산 사고가 성안으로 옮겨져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라고 불렸다. 그러나 지금은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 있다.
▲ 강화 삼랑성 남문(종해루)
삼랑성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즉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했을 때 이곳에서 관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관군은 프랑스군을 격퇴하였고, 지금도 성안에는 이때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양헌수 승전비’가 남아 있다.
▲ 양헌수 승전비 |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이다. 1873년 강화도 백성들이 세웠으며, 비석에는 양헌수 장군을 비롯한 367명의 군사들이 활약한 당시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성곽의 총 길이는 약 3킬로미터에 달하며, 본래 성곽의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었고 남문에만 문루가 있었다고 한다. 남문의 문루는 무너져 없어졌던 것을 1976년에 현재와 같이 복원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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