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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 용인 심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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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곡서원에 진입하기 전, 삼거리에 하마비와 안내판이 있다.

 

​▲ 심곡서원 전경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있으며, 사적 제530호이다.

 

서원이라고 하면 대부분 최초의 사액 서원인 소수서원이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등이 가장 많이 떠오를 것이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배운 서원에 대한 것은 그것이 거의 전부이다.

 

서원을 오늘날에 비교하여 쉽게 말하면 지방의 사립학교라고 할 수 있다. 서원과 비슷한 것으로는 향교나 성균관을 들 수 있는데, 이 셋을 쉽게 비유하자면 성균관은 서울의 국립대학, 향교는 지방 공립학교, 서원은 지방 사립학교라고 볼 수 있다.

 

조선 개국 이후로 오랫동안 정치를 좌우하던 훈구파를 누르고 사림이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조선 중기 이후로 서원이 크게 번성하여 전국에 수백 개의 서원이 생겼다. 서원의 번성과 함께 지방 공립학교인 향교는 점차 쇠퇴하였고, 향교를 대신하여 서원이 지방 교육의 중심 역할을 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인 물이 썩듯이 시간이 흐르면서 서원은 여러 가지 폐단이 쌓인 부패의 온상지로 변하였다.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도 세금을 내지 않아 국가 재정의 부실을 가져왔고, 가장 큰 문제는 붕당(당쟁)의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마침내 조선 말기인 1868,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퍼져 있는 수백 개의 서원 중에서 47개만 남겨 놓고 대부분 서원을 철폐하는 엄청난 개혁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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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 심곡서원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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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삼문

 

 

조선 시대의 교육기관인 성균관, 향교, 서원의 공통점은 모두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의 기능뿐만 아니라 유학의 선현들에 대한 제사의 기능까지 담당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건물의 배치는 크게 강학 공간(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과 제사 공간(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는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서원의 건물 배치는 향교와 거의 비슷하다. 이미 다른 포스팅에서 향교를 설명할 때 언급했던 전학후묘(前學後廟)’전묘후학의 배치를 보인다. 물론 다른 점도 많이 있는데, 예를 들면 향교에 명륜당이 있다면 서원에는 강당(講堂)이 있다. 강당은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건물이다.

또한 향교의 대성전 대신에 서원에는 사당(祠堂)이 있는데 말 그대로 사당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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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일소당) | 외삼문 뒤로 강당이 나온다.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이다.

​​▲ 서재

​▲ 장서각 | 책을 보관하는 서고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있는 심곡서원은 조광조(1482~1519)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조광조는 중종 때의 문신이자 개혁가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새롭게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림 세력은 지금껏 잘못된 정치 체제와 훈구 세력의 비리를 청산하고 새로운 조선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러 제도를 획기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조광조는 이러한 사림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 연산군 때에 무너진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비록 기묘사화로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정치사상은 후학들에게 이어져 조선 중기 이후 정치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묘사화: 1519년(중종 14년)에 중종이 주도하여 남곤, 심정 등이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이다.)

 

​​내삼문 | 강당 뒤쪽으로 있으며,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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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 | 사당은 제사 공간의 중심 건물이다. 조광조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조광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심곡서원은 1650(효종 1)에 건립되었고, 건립된 그 해에 바로 심곡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사액을 받았다는 말은 임금이 직접 사당이나 서원의 이름을 지어서 새긴 현판을 내렸다는 뜻이다. 사액을 받으면 그 사당이나 서원에 소속된 노비나 토지에 대하여 면세 특권까지 주어졌다.

 

​​조광조 묘역 | 지도 앱에는 '문정공 조광조 선생 묘 및 신도비'로 나온다. 심곡서원에서 걸어서 5~10분 거리에 있다.

 

​​▲ 조광조 묘역과 신도비 | 조광조는 1519년 사사된 후 다음 해에 이곳에 모셔졌고, 선조 때에 영의정으로 추증(죽은 뒤에 관작을 올려 줌)되어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사진 오른쪽의 신도비는 1585년(선조 18년)에 건립된 것이다.

 

 

 

심곡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철폐되지 않았던 전국 47개의 사원 중 하나로 가치가 높으며 현재 사적 제530호에 지정되어 있다. 또한, 심곡서원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 산기슭에는 조광조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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