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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선의 왕릉, 파주 삼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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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릉 | 파주 삼릉은 사적 제205호에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 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다.

 

 

 

조선의 왕릉은 대부분 서울시와 경기도에 몰려 있는데, 그 이유는 <경국대전>에 왕릉은 한양 도성에서 10(4km) , 100(40km)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이것은 왕이 왕릉을 참배하러 갈 때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를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

 

 

창덕궁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는 조선의 왕릉 3기가 모여 있는 파주 삼릉이 있다. 3기의 능은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인데, 앞 글자만 따서 파주 삼릉을 ‘공순영릉’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왕릉은 조선 시대의 왕과 왕비의 무덤입니다. 현재 북한 개성에 있는 2기를 비롯하여 모두 42기의 왕릉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조선 왕릉은 유교적 문화와 당시의 엄격한 절차에 따른 왕릉의 조성 양식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공간이다.

 

 

또한 이렇게 500년 이상 지속된 왕조의 능이 잘 보존된 예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이런 탁월한 가치 때문에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조선 왕릉 40기는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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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에서 바라본 공릉 | 보통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진 참도는 일직선이 원칙이지만, 공릉은 특이하게도 'ㄱ'자로 꺾여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도 이와 같이 되어 있음.)

 

 

파주 삼릉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능은 공릉(恭陵)이다.

공릉은 제8대 예종의 비인 장순왕후(1445~1461)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세조)이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한명회(1415~1487)의 딸이다.

흔히 칠삭둥이로 잘 알려져 있는 한명회는 세조에게는 마치 장자방과 같은 참모이자 책략가였다. 그는 두 딸을 8대 예종과 9대 성종에게 시집 보낼 정도로 당시에 큰 권세를 누렸던 인물이다. 말년에는 서울 강남의 한강변에 압구정이라는 유명한 정자를 짓기도 하였다.

 

 

 

장순왕후는 1460(세조 6)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인성대군을 낳은 후 산후병을 앓다가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인 예종이 1468년에 왕위에 올랐으니 왕비가 아닌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훗날 성종 때에 왕비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왕릉이 된 것이다.

 

 

 

▲ 영릉 | 진종과 효순왕후의 능으로, 높은 언덕 위에 봉분이 각각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능과는 달리 오른쪽에 비각이 2개 있고, 비석이 3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영릉(永陵)은 제21대 영조의 맏아들인 진종(1719~1728, 추존왕)과 그 비인 효순왕후(1715~1751)의 무덤이다. 진종은 6세에 왕세자(효장세자)가 되었으나 불과 9세에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조선의 왕릉 중에는 영릉이란 이름이 3개 있는데 제4대 세종대왕의 영릉(英陵), 그리고 제17대 효종의 영릉(寧陵), 그리고 파주 삼릉에 있는 영릉(永陵)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는 진종의 이복동생이다. 영조는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아들인 정조를 이미 세상을 떠난 진종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사도세자는 폐세자이자 죄인의 신분으로 죽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정조의 왕위 계승이 정통성을 갖추기 때문이다.

훗날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정조의 양아버지인 진종이 왕으로 추존되었다. 따라서 진종의 비인 효순왕후도 자연히 왕비로 추존되었던 것이다.

 

 

효순왕후는 1727(영조 9)에 진종과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고, 진종이 죽고 난 후에도 36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 말기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진종과 효순왕후를 황제와 황후로 추존함으로써 효순소황후로도 불린다.

 

이러한 까닭으로 영릉 앞에는 비각이 2개 있고, 비석은 3개나 있다. 황제와 황후로 추존된 후 비석을 하나 더 세웠기 때문이다. 영릉의 봉분은 진종과 효순왕후의 것이 따로 있으며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안장되어 있다.

 

 

▲ 순릉 | 공혜왕후의 능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진 참도가 다른 능에 비해 아주 긴 편이다.

 

 

 

마지막으로 파주 삼릉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순릉(順陵)은 제9대 성종의 비인 공혜왕후(1456~1474)의 무덤이다. 공혜왕후는 공릉에 묻힌 장순왕후와 자매 사이로, 장순왕후의 동생이며 역시 한명회의 딸이다.

 

공혜왕후는 1467(세조 13)11세의 나이로 당시 자을산군(훗날 성종)과 혼인하였고, 1470년에 성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474년에 자녀 없이 불과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결과적으로 공릉의 장순왕후와 순릉의 공혜왕후는 남편과 떨어져 홀로 있지만, 자매가 같은 묘역 안에 있으니 그나마 외로움은 덜하지 않을까 싶다.

 

 

▲ 재실 |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서울과 경기도에 흩어져 있는 조선 왕릉을 돌아다보면, 왕릉의 형식이 비슷하므로 어느 순간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각각의 왕릉에는 능이 만들어질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무덤에 모셔진 인물들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한 왕릉마다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식이 정자각과 석물 모양과 배치, 크기 등에 나타나 있으므로 그 소소한 차이점을 찾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조선의 왕릉은 공통적으로 배산임수를 기본으로 하여 당대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에 들어섰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풍수지리를 미신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과 어우러진 사후 공간을 만들고자 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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