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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선 말기의 전통 가옥, 서울 번동 창녕위궁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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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번동 창녕위궁재사 | 등록문화재 제40호

 

 

 

 

서울시 강북구에는 ‘북서울 꿈의 숲’이라는 이름의 대형 녹지 공원이 있다. 옛날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이곳에 '드림랜드'라는 강북 지역 최대의 놀이 시설이 있었다. 그런데 재정난 탓인지 관리와 시설 투자가 계속 이어지지 않고 있다가 서울시에서 지난 2009년에 오늘날과 같이 '북서울 꿈의 숲'이란 이름의 공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공원은 현재 서울에서 네 번째로 큰 공원이라고 하는데, 공원 안에는 조선 시대에 지어진 전통 가옥이 있어서 눈길을 끈다. 바로 등록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서울 번동 창녕위궁재사이다.

 

이 집은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의 둘째 딸인 복온공주(1818~1832)와 부마 창녕위 김병주(1819~1853)를 위한 재사(齋舍)이다. 여기서 부마란 임금의 사위를 뜻하고, 창녕위는 김병주에게 주어진 관직의 이름이다.

 

 

 

 

 

 

 

 

 

 

1830(순조 30)에 순조의 딸인 복온공주는 김병주를 남편으로 맞아 시집을 갔는데, 이때 순조는 사위가 된 김병주에게 '창녕위(昌寧尉)'라는 봉작을 내렸다.

사실 김병주는 그 유명한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복온공주의 어머니인 순원왕후 김씨도 안동 김씨이다. 잘 알려진 대로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 때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이른바 '세도 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대였다.

 

재사(齋舍), 쉽게 말해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집이란 뜻이다. 비슷한 말로 재실(齋室)이라고도 한다.

보통 재사는 묘소를 관리하거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이므로 묘소 근처에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이 집 맞은편 산에 김병주와 복온공주의 합장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이 일대를 가리켜 '공주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병주와 복온공주의 무덤은 지난 2002년에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되어 현재는 창녕위궁재사만 남아 있다.

 

 

 

 

 

 

 

 

이 집은 크게 안채, 사랑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1800년대 중반에 지어졌다. 그중에서 안채는 6.25 전쟁 때에 파괴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전체적으로 재사를 겸한 살림집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경기 지방 살림집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또한 1910년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한 후, 김병주의 손자인 김석진(1847~1910)이 이 집에서 자결하였다고 한다.

김석진(1847~1910)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항일 우국지사로, 김병주의 손자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오적신(五賊臣,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을 상소하였고, 1910년 국권을 빼앗긴 후 일제가 남작의 작위를 내려 회유하려고 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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