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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서울의 북쪽을 방어하던, 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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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 | 사적 제162호

 

 

서울의 북쪽과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북한산은 서울과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등산객이 찾는 산 중 하나이다.

국립공원이기도 하며 일 년 내내 등산객과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북한산은 지세가 험하고 높은 봉우리를 여럿 끼고 있다. 특히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라는 세 개의 큰 봉우리가 돋보여서 옛날부터 ‘삼각산(三角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예로부터 도성의 경계를 이루는 내사산(內四山; 북악산, 낙산, 인왕산, 남산)과 도성을 외곽에서 한 번 더 감싸는 외사산(外四山)에 둘러싸인 한양은 천혜의 요새와 같은 곳이자 풍수지리상 길지에 속한다고 여겨졌다. 여기서 외사산은 북쪽의 북한산(삼각산), 동쪽의 용마산, 서쪽의 덕양산, 남쪽의 관악산을 가리킨다.

 

 

외사산의 하나인 북한산은 서울 근교에서 가장 높고 산세가 험하며 그 모습이 웅장하여 특별히 서울의 진산(鎭山, 또는 主山이라고도 함)으로 여겨졌다.

북한산(北漢山)이란 이름은 옛날에 서울을 가리키는 한산(漢山)이란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한산 북쪽에 있는 산이란 뜻이다.

 

 

​▲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북한산 | 세 개의 큰 봉우리가 있어서 옛날부터 '삼각산'이라고 불렸다. 

 

 

사적 제162호에 지정된 북한산성은 조선 시대에 북한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이다. 병자호란 때에 인조가 피신했던 남한산성과 더불어 한양도성을 남과 북에서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성곽이다.

 

본래 북한산에는 삼국 시대부터 백제가 쌓은 성이 있었다.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곳에 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후 신라가 진흥왕 때에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이곳에 순수비(국보 제3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시대에도 몽골의 침략을 맞아 이곳에서 전투를 벌인 적이 있다. 이를 통해 이미 조선 시대 전부터 북한산에는 산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때까지는 돌로 쌓은 석성이 아닌 흙으로 다진 토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대서문 | 북한산성의 서쪽 대문이다.

 

 

 

북한산성이 오늘날과 같이 돌로 쌓은 성곽의 모습을 제대로 갖춘 시기는 조선 제19대 왕인 숙종 때이다.

그 전부터 조정에서는 북한산에 성곽이 있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북한산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외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고, 무엇보다 도성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이곳에 성곽이 있다면 한양도성을 지키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곽의 축성은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큰 외침을 겪으면서 북한산성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마침내 1711(숙종 37) 숙종의 명으로 비로서 북한산성이 지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벽 등은 바로 이때 지어진 것이다. 17114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그해 9월에 끝났다고 하니 불과 6개월 만에 북한산성이 완성된 것이다. 당시의 발달된 축성 기술은 물론이고 높고 험준한 곳에는 성곽을 쌓지 않거나 낮게 쌓는 등 산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북한산성은 총 6개의 대문과 8개의 암문, 2개의 수문 등이 갖추어졌고, 성곽의 길이만 12.7km에 이르며, 성 안쪽의 면적은 여의도 면적보다 클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성 내부에는 비상시에 임금이 머무를 행궁뿐만 아니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장대도 3곳이나 마련되었다.

​​남한산성과 마찬가지로 북한산성도 한양도성을 방어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전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피난할 수 있는 임시 궁궐로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북한산성은 또한 한양도성 북쪽의 탕춘대성과도 연결되어 북한산성 - 탕춘대성 - 한양도성으로 이어지는 도성 북쪽의 탄탄한 방어 체계가 갖춰지게 되었다.

​▲ 1902년의 북한산성(대서문 주변) 사진

 

 

안타깝게도 북한산성이 완성된 이후 변란이나 외침과 같이 도성을 수호해야 할 기회는 없었다. 북한산성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쓰임새가 없어져 점차 옛 모습을 잃어갔다.

 

일제강점기에는 폭우와 화재 때문에 행궁을 비롯한 성안의 여러 전각과 시설이 사라졌고, 관리를 받지 못한 성벽들은 점차 무너져 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복원 공사를 통해 옛 모습을 거의 회복하였으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유물 발굴과 복원 사업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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