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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선 시대의 석비, 금암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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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암기적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호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는 조선 시대인 1781(정조 5)에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을 세운 사람은 22대 임금인 정조이다. 그는 19대 왕 숙종의 묘인 명릉을 참배하고 궁궐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할아버지인 영조에 관한 일을 떠올리며 이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숙종은 영조의 아버지이므로 정조에게는 증조할아버지이다. 숙종의 묘인 명릉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 안에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진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6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비석의 이름인 금암기적비에서 금암검암(黔巖)’에서 비롯된 말이다. 검암은 '검은 바위'란 뜻인데, 지금의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에 옛날에 검은색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조선 시대에 이곳은 검바윗골’, 또는 금암리라고 불렸다.

 

 

 

 금암기적비 |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428번지, 금암문화공원 안에 있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가까운 이 지역은 오늘날 '은평뉴타운'이라는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한양에서 북쪽 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이었으며, 특히 중국을 오가는 사신이나 상인들은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의주로 향하는 역참(驛站: 국가의 공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말을 바꾸어 타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 있었다. 오늘날 역촌동 또는 구파발동이라는 이 일대의 지명도 역참이 있던 곳’, 또는 파발이 지나가던 곳이란 뜻이다.

 

이 비석에 얽힌 일화는 다음과 같다.

 


1721년에 영조는 아버지인 숙종의 묘(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 역참 부근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에 영조는 임금의 신분도 아니고 세자도 아닌 단지 왕자의 신분(당시 이름은 연잉군)이었다. 이미 숙종의 원자이자 영조의 형인 경종(조선 20대 왕)이 왕위에 오른 뒤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영조가 머무르던 숙소 근처에서 남의 소를 훔치려던 도둑이 잡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영조가 도둑을 직접 불러 그 까닭을 물으니 도둑은 여러 날을 굶어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했다고 말하며 서럽게 울었다. 이에 영조는 도둑을 타일러 그냥 돌려보내도록 하고, 이러한 일은 정치의 잘못이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왕위에 오른 뒤에 이 일을 떠올리며 백성을 위한 어진 정치를 펼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 하마비 | 보통 궁궐이나 무덤, 사당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신성한 곳이니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비석이다.

 

 

 

훗날 정조는 숙종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할아버지 영조가 겪었던 이 일화를 떠올리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친히 글을 짓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남아 있는 금암기적비이다.

 

 

비석의 높이는 148센티미터, 폭은 68센티미터이다.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은 최근에 지어졌다. 옛날에는 이곳에 역참의 건물인 참사(站舍)도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흔적 없이 사라졌고, 비석의 우측으로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 하마비(下馬碑)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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