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주 신륵사 | 신라 때 창건되어 고려 우왕 때 나옹 선사가 돌아가신 곳으로 유명하며 조선 시대에는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이 여주로 이장되면서 원찰이 되어 '보은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서울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북한강과 남한강이 갈라지는 양평을 지나 남한강을 따라 가다 보면 경기도 여주시가 나온다. 서울에서 비교적 멀지 않은 이 고장은 ‘여강(驪江)이 흐르는 고장’이라고 하여 여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여강은 남한강의 옛 이름이다.
옛날부터 경기도 여주는 넓고 비옥한 땅에서 나는 질 좋은 쌀로 유명한 고장이다. 뿐만 아니라 흙이 기름지고 찰기가 있어서 궁궐에서 사용하는 그릇도 이곳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에는 도자기가 유명한 고장이기도 하다.
▲ 남한강변에 인접해 있는 정자 강월헌 | 정자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 선사의 호에서 딴 이름이다.
경기도 여주를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인 신륵사는 창건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신라의 진평왕 때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진평왕 때가 7세기 초이므로 무려 1,4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이 여주를 대표하는 큰 사찰로 발전한 것은 고려 후기의 유명한 고승인 나옹 선사(1320~1376)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 큰 깨달음을 얻고 당시 중국의 원나라로 건너가서 중국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공부하였으며 공민왕 때에 고려로 돌아와 평생 불교의 대중화와 중흥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송광사와 회엄사 등에 머물며 여러 곳으로 법회를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이곳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 구룡각
▲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 나옹 선사의 사리를 보관한 종 모양의 돌로 만든 부도이다.
▲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 나옹 선사의 사리를 보관한 보제존자 석종 앞에 놓인 회색의 대리석으로 만든 석등이다.
▲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 보제존자 석종을 만든 내력을 적은 비석이다.
나옹 선사가 세상을 떠날 때 수많은 이적(기이한 일)이 일어났는데, 구름이 산을 뒤덮고 구름도 없는 맑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도 했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고려 우왕 때인 1376년에는 신륵사 뒤쪽 언덕에 그의 사리를 모신 부도를 세우고 새로운 건물을 새로 세우는 등 오늘날과 같은 큰 사찰로 중건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절의 위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이 여주에 조성되면서 왕릉의 원찰(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고 그 무덤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사찰)로 정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경치가 뛰어난 강가에 위치해 있어서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하기도 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거의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서 폐허가 되기도 했다.
▲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 신륵사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새긴 비석이다.
▲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고려 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높이는 9.4미터이다. 전탑이란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이란 뜻이다.
신륵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이 바로 신륵사를 대표하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옹 선사의 사리를 모신 돌로 만든 종인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과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비천과 용이 새겨져 있는 석등(보물 제231호),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이 남아 있다.
신륵사 남쪽으로는 남한강에 인접해 있는 강변에 ‘강월헌’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고, 바로 옆에는 나옹 선사를 화장했던 터에 세운 삼층 석탑도 하나 있다.
▲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 화강암으로 만든 3층 석탑으로, 나옹 선사를 화장한 장소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 여주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 신륵사에 남아 있는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신륵사가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의 원찰이 되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사찰이 산속에 많이 있는 데 비해 신륵사는 남한강변에 있어서 주변의 풍광이 아주 수려하다. 사찰의 북쪽으로는 봉미산이라는 아주 나지막한 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남한강변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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