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도성의 8개 문
▲ 한양 도성과 사대문, 사소문의 위치 | 한양 도성은 네 개의 산(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을 이어서 쌓은 성곽임을 알 수 있다.
▲ 북악산의 한양 도성 성곽 | 인왕산 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태조 이성계가 창업한 조선 왕조는 고려 왕조의 수도인 개경을 떠나 한양을 나라의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고, 도읍의 경계에 성곽을 쌓아 도성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서울에 남아 있는 한양 도성이다.
위의 그림을 살펴보면 당시에 한양 도성은 네 개의 산(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을 이어서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양 도성을 감싸고 있는 이 4개의 산을 가리켜 '내사산'이라고 한다.
도성의 성곽을 쌓으면서 당연히 도성을 드나들 수 있는 성문도 지었다. 도성의 동서남북으로 각각 하나씩 커다란 대문을 만들고, 대문과 대문 사이에는 그보다는 작은 소문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한양 도성에는 모두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생겼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국보 숭례문과 보물 흥인지문, 북악산 위에 지어진 숙정문과 서쪽 대문인 돈의문이 바로 4대문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살펴볼 4소문은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인데,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에 '도시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에 많은 성문이 파괴되어 그 흔적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현재 많은 복원이 이루어졌지만, 돈의문과 소의문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 돈의문(서대문) 터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근처, 강북서울삼성병원 앞이다. 성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그 터만 있다.
1. 창의문
사소문 가운데 북쪽에 있는 창의문은 유일하게 조선 시대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자하문’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에 불타서 없어진 것을 1740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다른 문들이 일제 강점기에 많이 파괴되었지만 창의문은 비교적 높은 산 속에 있어서 옛 모습을 지킬 수 있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에 반정군이 이 문을 통하여 도성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리는 이른바 '인조반정'에 성공하였다. 이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반정군이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칼을 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세검정'이 있다.
지금도 창의문의 문루에 오르면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웠던 공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다.
1968년 1.21 사태 때에는 이 근처에서 김신조 일당과 총격적인 벌어지기도 했으며 그때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근처에 세워져 있다.
▲ 창의문(자하문) | 사소문 중에서 조선 시대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성문이다. 자하문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있다.
▲ 낙산 쪽에서 숙정문 쪽으로 올라가는 한양 도성 성곽
2. 혜화문
현재 지하철 4호선 혜화역과 한성대입구역 사이의 큰길 가에 있는 혜화문은 한양 도성의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동소문'으로 불렸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고 지었으나 15세기 말에 새롭게 지어진 창경궁의 정문 이름을 홍화(弘化)라고 지으면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혜화(惠化)문'으로 바꾸었다.
혜화문은 비록 사소문 중의 하나로 지어졌지만 사실상 도성의 북쪽 대문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본래 북대문인 숙정문은 북악산이라는 높은 산 위에 있어서 사람들이 왕래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적으로 '음기'가 강하다고 하여 늘 닫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혜화문은 숙정문을 대신하여 한양과 북쪽 지방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에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전차가 지나가는 길을 만들면서 성문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오늘날에 남아 있는 문은 1992년에 복원해 놓은 것이며, 성문을 좌우로 잇던 성벽은 남아 있으나 큰 도로로 마치 허리가 잘린 것처럼 남아 있다. 혜화문의 원래 위치는 도로 한복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본래의 위치보다 약간 북쪽에 다시 세웠다.
▲ 혜화문 | 사소문 중에서 북동쪽에 있던 문으로, 동소문으로 불렸다.
▲ 혜화문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한양 도성 성곽 | 옛 성곽 돌과 복원된 성곽 돌이 색깔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 혜화문에서 이어지는 성곽 | 이렇게 주택가의 담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3. 광희문
광희문은 도성의 남동쪽에 있던 문으로, 도성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내보내던 문이라고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현재 광희문에 붙어 있는 동네 이름이 '신당동'이다. 오늘날에는 '신당동 떡볶이'로 유명한 곳인데, 옛날부터 도성 안의 시체를 광희문을 통해 내보냈으므로 이 동네에는 자연히 무당집(신당)이 많이 있어서 유래한 이름이다.
또한 문의 위치가 청계천에서 가깝고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 문 근처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수구문(水口門)'으로도 불렸다.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문루와 성벽이 크게 훼손되었고, 현재의 문은 1975년에 다시 문루를 복원하고 성벽을 수리하여 만든 것이다.
▲ 광희문 | 사소문 중에서 남소문에 해당하며, 시구문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4. 소의문
소의문은 도성의 서쪽 대문인 돈의문과 남쪽 대문인 숭례문 사이에 있던 문으로, 두 대문과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다. 오늘날 돈의문과 함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두 문이기도 하다.
소의문은 옛날에 ‘서소문’ 또는 ‘소덕문’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처음 한양 도성을 지을 때에는 소덕문(昭德門)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아래 표지석 사진에 나와 있듯이 예종 때 소의문(昭義門)으로 고쳤다고 한다.
광희문과 함께 도성에서 나오는 시체를 내보냈던 문이기도 하며, 일제 강점기에 도시 계획에 의하여 근처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어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 소의문(소덕문) 터 | 소의문은 옛날에 '소덕문'으로도 불렸으며 사소문 중에서 서소문에 해당한다. 현재는 완전히 사라져 그 터에 표지석만 남아 있다. 숭례문과 서대문역 사이의 중앙일보 사옥 바로 앞의 길가에 작은 표지석이 남아 있다.
▲ 소의문과 숭례문을 잇는 성곽 일부 | 소의문 터에서 숭례문으로 가는 길에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복원된 성곽 돌과 옛 성곽 돌이 색깔로 잘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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