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잠저, 용이 살았던 집
▲ 용흥궁 전경(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 용흥궁 현판
여러분은 혹시 ‘강화도령’이란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강화도령이란 왕위에 오르기 전 강화도에 살았던 도령, 즉 조선의 제25대 왕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마 조선의 역사에서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만큼 극적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철종만큼 불행한 왕도 없을 것이다. 그는 뜻하지 않게 왕위에 올라, 비록 왕이 되었지만 제대로 된 왕권을 행사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비운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용흥궁은 철종이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어 1849년 1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따라서 용흥궁은 철종의 ‘잠저(潛邸)’이다.
▲ 용흥궁 입구
▲ 용흥궁 내전
잠저란?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연못에 엎드려 있다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에 비유하면서, 아직 엎드려 있는 용을 ‘잠룡(潛龍)’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도 가끔 신문 기사를 보면, 아직 드러나지 않지만 훗날 대통령이 될 가능성 있는 사람을 가리켜 흔히 잠룡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대대로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임금이 입는 옷을 용포, 임금의 얼굴을 용안, 임금의 눈물을 용루라고 부른다.
잠저란 잠룡이 살던 집, 즉 ‘용이 승천하기 전에 엎드려 있던 집’이란 뜻이다.
정상적인 과정이라면 왕위에 오르는 사람은 ‘왕세자’다. 왕세자는 대궐 안의 동궁에 살게 된다. 그러나 모든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임금이 후사 없이 세상을 뜨는 경우, 또는 세자를 제치고 다른 왕자나 왕족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 또는 반정이 일어나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경우 등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왕위에 오를 수 있다.
이와 같이 본래 임금이 될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 대궐 밖에 살던 집을 잠저라고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살았던 새문동 정원군의 집(오늘날 경희궁 자리)이나 고종이 살았던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등이 잠저라고 할 수 있다.
▲ 철종 어진(철종 임금 초상) | 어진은 임금의 초상화를 말하는데, 이 그림은 철종이 31세 때인 1861년(철종 12년)에 도화서에서 그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6.25 때에 1/3 가량이 화재로 훼손되었다.
잠저는 대부분 궁(宮)으로 높여 부르며 특별히 관리하는 것이 관례였다. 철종이 살았던 강화도의 용흥궁도 본래는 보잘것없는 초가집이었지만, 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집을 보수하고 단장하여 용흥궁(龍興宮)이라고 불렀다. 이름 그대로 '용이 일어난 집'이란 뜻이다.
2. 강화도령, 왕위에 오르다
그렇다면 왜 철종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강화도에 살게 되었을까? 철종이 왜 강화도에 살게 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철종은 제22대 왕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사도세자의 서자)의 손자이며, 은언군의 서자인 전계대원군 이광의 아들이다. 대원군은 왕의 아버지를 부르는 말로, 본래 이광은 서자이므로 작위도 없었지만,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 칭호가 붙은 것이다.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은 사도세자(정조의 아버지)와 후궁인 숙빈 임씨의 소생으로, 아들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게다가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신유박해(1801년 천주교도 박해 사건) 때에 죽임을 당했고, 이때 은원군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때부터 철종의 집안은 역도를 배출했다는 이유로 신분이 격하되어 양민으로 살아야 했다.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 이광(1785~1841)도 강화도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까지 할 정도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 나갔다고 한다.
▲ 비각과 그 안에 보관된 비석 | 비석에는 이곳이 철종의 잠저임을 기록한 '철종조잠저구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던 1849년에 제24대 왕 헌종이 갑자기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이에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세도 가문 안동 김씨는 이광의 서자(庶子)인 원범을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조선의 제25대 왕인 철종이다.
철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강화도에서 나무를 캐거나 농사를 짓던 젊은이였다. 비록 왕족의 혈통이지만 역모를 일으켜 멸문지화를 당한 집안이었으며, 아버지도 서자, 본인도 서자 출신이고, 심지어 철종 자신은 글도 쓸 줄 몰랐다고 한다. '강화도령'은 이런 그를 비웃으며 붙은 별명인 셈이다.
이렇듯 안동 김씨가 기본적인 왕위 계승 서열과 절차를 무시하고 철종을 왕으로 선택한 이유는 오로지 자신들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힘없는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힘없는 왕족을 왕위로 올려야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강화도령’ 철종은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임금이 되어버렸다. 왕위에 오르고 나서 바로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맡았고, 모든 권력은 철저하게 안동 김씨가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에 철종은 그냥 이름뿐인 왕에 불과하였다.
▲ 내전(안채)
▲ 외전(사랑채)
철종이 왕위에 있던 19세기 중반은 조선 시대에서 가장 어둡고 혼란한 시기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극에 달하였고, 특히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민생은 피폐하여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나라는 혼란에 빠져 있고 백성의 삶은 고달프기 이를 데 없어 나라의 운명도 점차 기울고 있었다.
결국 14년의 재위 기간 동안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철종은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철종의 죽음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비로소 60년간 이어오던 세도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현재 용흥궁은 강화군청 근처에 있는 인천강화경찰서에서 서쪽으로 난 작은 골목을 따라 가면 찾을 수 있는데, 외전(사랑채)과 내전(안채)을 비롯하여 행랑채, 우물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이곳이 철종의 잠저임을 기록한 ‘철종조잠저구기’라고 새겨진 비석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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