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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선 시대의 다리, 살곶이다리(전곶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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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곶이'라는 이름의 유래

▲ 살곶이다리(전곶교) | 조선 시대의 다리로, 보물 제1738호에 지정되어 있다.

 

 

 

 

서울에서 오래 사신 분들은 살곶이다리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 보셨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양대학교 바로 옆을 흐르는 중랑천에 있는 다리,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이 지점에 놓여 있는 다리가 바로 살곶이다리이다. 한자로는 '전곶교(箭串橋)'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 도읍인 한양 도성에서 동쪽과 남쪽 지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흥인지문이나 광희문 쪽으로 나와서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했다. 살곶이다리는 또한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다리이기도 하다.

 

살곶이는 ‘살꽂이’가 바뀐 말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 멀리서 바라본 살곶이다리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물 아래쪽, 중랑천 위에 놓인 다리이다.

 

 

 

조선 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은 아직 이성계가 장수로서 이름을 떨치기 전에 고향에서 맞이한 '향처(鄕妻)' 한씨(훗날 신의왕후)였고, 둘째 부인은 당시 고려의 도읍인 개경에서 맞이한 '경처(京妻)' 강씨(훗날 신덕왕후)였다. 고려 말기에는 이렇게 고급 관리들이 향처와 경처를 각각 맞이하던 것이 일종의 관습이었다.

 

첫째 부인 한씨는 여섯 아들(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을 낳았고, 둘째 부인 강씨는 두 아들(방번, 방석)을 낳았다. 그런데 첫째 부인은 조선을 개국하기 일 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를 창업한 후 둘째 부인인 강씨가 조선의 첫 번째 왕후가 되었다.

 

둘째 부인 강씨는 권문세가 출신으로 지략이 뛰어났다. 강씨와 그녀의 집안은 이성계의 정치적 후원자이자 동반자로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 역시 그런 강씨를 무척 아끼고 의지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부인 강씨는 정치적 수완도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자신의 소생인 방석이 세자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다른 장성한 아들들을 다 제치고, 장남도 아닌 막내아들 방석이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가 되자, 첫째 부인 한씨의 여섯 아들은 무척 황당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정몽주를 죽이고 새 왕조 창업의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다섯째 아들 방원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훗날 1차,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둘째 부인 소생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이미 세상을 떠난 둘째 부인 강씨의 무덤(정릉)을 파괴하여 사대문 밖으로 이장시켰다. 힘을 잃은 늙은 아버지 이성계는 그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형제들을 무참히 죽이고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부인의 무덤까지 파괴한 방원이라는 놈은 이미 아들도, 인간도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결국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제3대 태종), 이성계는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가 버렸다. 왕조의 창업자인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야 정통성이 생기는 법, 방원은 아버지를 다시 한양으로 모셔오기 위해 함흥으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성계는 사신을 죽여 버렸다. 그래서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누구든 나를 데리러 오는 놈은 죽여 버리겠다.’라고 마음먹은 이성계였지만, 오직 한 사람 무학대사만은 예외였다. 결국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방원은 기쁜 나머지 도성 밖 중랑천까지 나와 아버지인 이성계를 기다렸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챈 태종(방원)의 책사 하륜은 아주 굵은 기둥을 세워 장막을 만들도록 하였다.

 

하륜의 예상대로 이성계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중랑천 부근에 이르자, 그토록 미워했던 짐승 같은 아들놈이 보였다.

이성계는 지체 없이 활을 꺼내 화살을 날렸다. 이성계가 누구인가? 천하의 신궁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성계, 그러나 하늘의 뜻이었을까?

방원이 재빨리 미리 준비해 둔 기둥 뒤로 몸을 숨긴 덕에 화살은 그만 기둥에 꽂히고 말았다. 이성계는 그제야 이 모든 일이 하늘의 뜻이라 여겼다. 그리고 방원을 왕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 살곶이다리

 

 

 

 

 

2. 보물로 지정된 조선 시대의 다리

▲ 살곶이다리(전곶교예전 모습

 

 

 

 

이때부터 이 부근에는 ‘살꽂이’라는 지명이 붙여졌고, 이곳에 놓인 다리는 살꽂이다리가 되었다이곳은 한양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청계천과 한천(漢川, 현재의 중랑천을 가리킴)이 만나는 곳이다. 

 

살곶이다리는 1420(세종 2)에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종은 매사냥을 즐기기 위해 이곳에 자주 행차하였는데, 교통을 위해 다리를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리는 완성되지 않고 여러 차례 공사를 중단하였다가 성종 때인 1483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그후 살곶이다리는 한양과 동남부 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 구실을 하였다. 다리 위에는 마치 평평한 마룻바닥처럼 넓은 판석을 깔았기 때문에 다리를 건널 때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고 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 돌기둥 |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돌기둥의 단면이 마름모꼴로 되어 있다.

 

 

 

 

다리의 전체 길이는 76미터로, 조선 시대의 다리 중에서도 가장 길다. 난간이나 장식이 전혀 없는데, 돌기둥은 가로로 4개씩, 세로로 16개씩 있어 모두 64개의 돌기둥이 다리를 떠받치고 있다. 돌기둥의 모양은 마름모꼴인데, 이것은 물의 저항을 최대한 적게 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조선 말기인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단행하자, 궁궐의 자재로 쓰기 위해 다리의 일부 석재를 가져다 썼다고도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일어난 큰 홍수로 다리의 일부가 없어졌지만 1972년에 보수하였고, 이때 옛날보다 하천의 폭이 넓어진 탓에 동쪽으로 콘크리트로 다리를 만들어 이어 붙였다.

 

오늘날에는 부근에 여러 다리가 생기면서 교통로로서의 기능은 거의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지역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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