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로 왕실의 가족들이 머물렀던 창경궁
▲ 동궐도 | 1824~1828년 무렵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으로, 전각의 위치와 모양 등 세세한 부분까지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 즉 오늘날의 서울에는 조선 시대의 궁궐 다섯 곳이 남아 있다. 조선 왕조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을 비롯하여 옛날에 동궐이라고 불렸던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서궐이라고 불렸던 경희궁, 마지막으로 덕수궁이다.
오늘날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는 창경궁은 본래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 14년(1483년)에 당시 살아 계셨던 세 분의 대비(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추존)비 소혜왕후)를 모시기 위하여 옛 *수강궁 터, 즉 창덕궁의 동쪽에 지은 궁궐이다.
수강궁은 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머물기 위하여 1418년에 지은 별궁이다. 훗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잠시 머무르기도 한 곳이다. 창경궁은 수강궁을 확장하여 지은 별궁이라고 할 수 있다.
▲ 홍화문 | 창경궁의 정문으로, 다른 궁궐의 정문과는 달리 동향으로 되어 있다.
▲ 홍화문의 옛 모습
이렇게 하여 지어진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된 하나의 궁궐처럼 여겨졌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도성의 동쪽 궁궐이란 뜻으로 ‘동궐’이라고 불렀다. (북궐은 경복궁, 서궐은 지금의 경희궁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창경궁은 창
덕궁의 모자란 공간을 보충하면서 주로 왕실의 가족들이 머무르는 궁궐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양화당 | 1833년에 중건한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었다.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 중에 모든 궁궐이 불에 타서 없어지고 창경궁의 여러 건물들 역시 모두 소실되었다. 광해군 때에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새롭게 중건하면서 법궁으로 삼으면서 창경궁도 역시 다시 지어졌다. 그후 이괄의 난(1624년)과 여러 차례의 화재 때문에 창경궁 안의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다. 창경궁에는 유독 화재가 자주 일어났는데, 다행히 이때까지도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 등은 온전히 남아 오늘날까지 17세기의 궁궐 건축 양식을 잘 전하여 주고 있다. 그 밖의 함인전, 환경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 집복헌 등의 전각은 19세기 초인 순조 때에 다시 지었다.
▲ 통명전(보물 818호) | 1833년에 중건한 침전의 중심 건물로, 창경궁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지붕 위의 용마루가 없으며, 가운데 3칸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왕과 왕비의 침실로 사용하였다.
▲ 옥천교 | 정문인 홍화문을 지나면 나오는 돌다리로, 조선의 궁궐은 모두 이와 같이 물길을 지나는 돌다리를 건너서 정전으로 가도록 만들어졌다.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 명정전 | 창경궁의 정전(궁궐의 으뜸 건물)으로, 국보 제226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시대 궁궐 전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1616년(광해군 8년)에 지어졌다. 홍화문과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어 마찬가지로 다른 궁궐의 정전과는 달리 동향으로 되어 있다.
2. 일제 강점기에 유원지가 되어버린 창경궁
다른 궁궐도 마찬가지였지만 창경궁은 특히 일제 강점기에 커다란 수난을 겪었다. 1909년, 일제는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 안의 많은 전각들을 허물로 궁궐 전역을 마치 공원처럼 만들어 놓더니 아예 동물원과 식물원을 궁 안에 만들어놓았다. 이때 궁궐로서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렸다. 또한 궁 안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나 심어 놓아 벚꽃놀이 장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1911년에는 아예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유원지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는 원래 이어져 있었는데, 1932년에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큰 도로를 만들어 버렸다.
창경원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관광지와 공원으로서 이용되었다. 아마 서울시민 중에도 어린 시절 ‘창경원’에 가서 여러 가지 동물을 구경했거나, 아니면 벚꽃을 즐기러 갔던 유원지로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창경원은 198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궁궐로 복원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때 동물원과 식물원에 있던 여러 동식물들은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현재 창경궁은 사적 제123호에 지정되어 있으며, 창경궁의 정전(중심 건물)인 명정전은 국보 제226호에 지정되어 있다.
▲ 문정전 | 임금과 신하가 회의를 하고 의견을 나누던 창경궁의 편전이다.
▲ 영춘헌과 집복헌 | 사진 왼쪽이 집복헌, 오른쪽이 영춘헌이다. 이 일대는 본래 후궁들의 처소가 모여 있던 곳으로, 영춘헌과 집복헌도 역시 후궁의 거처였다. 현재는 두 전각이 붙어 있지만 본래는 분리되어 있었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헌에서 태어났고, 정조는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 환경전 | 창경궁의 내전으로, 왕이 수시로 거동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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