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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충무공 이순신의 무덤, 아산 이충무공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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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 이충무공 묘 (사적 제112호)

 

 

 

 

1. 성웅 이순신이 잠든 곳

 

사적 제112호에 지정되어 있는 아산 이충무공 묘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영웅,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바로 그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이 묻힌 곳이다.

흔히 이순신 장군의 무덤이 아산 현충사에 있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현충사 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과 장군이 살았던 집이 있지만, 실제 그가 묻힌 무덤은 현충사로부터 북쪽으로 약 9Km 떨어진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고 무덤은 따로 있다. 여기서 잠깐 사당과 무덤의 차이점을 알아보자.

조선 왕조는 유교를 국가 통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은 국가였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은 무덤(, )을 만들어 그곳에 묻었고, 혼은 사당(, )에 모셨다. 같은 묘이지만 한자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조를 예를 들자면, 흔히 선정릉, 정릉이라고 부르는 조선 왕릉은 무덤이고, 이런 왕과 왕비들의 사당은 종묘(宗廟)이다. 다만 왕과 왕비의 무덤은 묘()라고 하지 않고 릉()이라고 높여 부르는 것이다.

 

사당에는 죽은 사람의 혼을 대신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나무패인 위패(位牌)를 모셨다. 위패를 가리켜 신위(神位)나 신주(神主)라고도 부른다(엄밀히 말하면 신위나 신주는 위패뿐만 아니라 지방까지 포함함).

따라서 시신은 하나이므로 무덤은 하나뿐이지만 위패를 두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여러 곳에 있을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사당만 해도 대표적으로 아산의 현충사뿐만 아니라 통영의 충렬사, 여수의 충민사 등 전국 곳곳에 있다. 사당에서는 보통 위패와 죽은 이의 초상화를 모시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곤 한다.

 

 

▲ 음봉사거리에서 음봉초등학교를 지나 계속 가다 보면, 위와 같은 표지판과 비각이 보인다.

 

 

 

 

2. 대중교통으로 가는 길

 

 

아산(온양) 버스터미널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이충무공 묘소를 찾아가려면, 터미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음봉면사무소가 있는 음봉사거리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야 한다. 편의점이 있는 음봉사거리에서 음봉초등학교를 지나 계속 걸어가다 보면 이충무공 신도비가 있는 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서부터 오른쪽으로 이충무공 묘소 입구까지 걸어가면 된다.

 

▲ 이충무공 신도비 | 오른쪽 비각 안에 있는 것이 이충무공 신도비이고, 왼쪽의 작은 비석은 충무공의 5대손인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이다.

 

​▲ 이충무공 신도비 | 1693년에 세운 비석으로, 거북모양으로 새긴 받침돌이 인상적이다.

 

 

 

 

 

이순신 장군이 잠들어 계신 무덤은 어라산이라는 작은 산 아래에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장군이 돌아가시자, 처음에 유해는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古今島)로 옮겨졌다가 이듬해인 1599년에 아산시 금성산에 모셔졌다. 그리고 1614(광해군 6)에 다시 이곳 어라산으로 옮겨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1545년 오늘날 서울시 중구 충무로 근처인 서울 건천동(오늘날 서울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언제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장군은 아주 어렸을 때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기 전(32)까지 아산에서 지냈다고 한다. 따라서 비록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아산이야말로 이순신 장군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 이충무공 묘소 입구로 가는 길

▲ 이충무공 묘소 입구 | 입장료는 무료이지만 월요일에는 문을 닫는다.

 

​▲ 홍살문 | 입구를 지나 계속 올라가면 홍살문이 보인다.

 

 

 

 

민족의 영웅이 잠들어 계신 곳답게 이충무공 묘소는 잘 정돈되어 있다. 묘역 전체의 부지도 꽤 넓은 편이며 그 업적에 어울리게 신도비와 비각이 있고, 봉분도 마치 왕릉과 같이 상당히 큰 편이다.

 

신도비(神道碑), 임금 또는 정2품 이상의 관직을 거친 사람의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죽은 사람의 업적이나 학문적 성과를 후세에 알려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다. 그중에서도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란 임금이 직접 글을 지어 내린 신도비를 말한다.

 

 

 

​▲ 묘소 아래에 있는 어제신도비각 | 비각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을 말한다.

 

▲ 비각 안의 어제신도비 | 문이 잠겨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다.

 

​▲ 비각 오른쪽에 어제신도비의 내용을 설명해 놓은 또다른 비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신도비는 묘역의 진입로인 삼거리 앞에도 있고 봉분 아래에도 하나가 있는데, 진입로 앞에 있는 신도비는 1693년에 세운 것이고, 봉분 아래에 있는 신도비는 1794(정조 18)에 세운 비석이다.

 

​​특히 봉분 아래에 있는 신도비가 앞서 언급했던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인데, 정조가 친히 비문을 지어 내린 것이다.

어제신도비 오른쪽에는 비문의 내용을 설명해 놓은 넓적한 비석이 따로 있다. 어제신도비의 내용 가운데 정조의 말을 일부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장하신 선조 대왕이 나라를 일으킨 공로의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큰 힘에 의한 것이다.
이제 내가 충무공에게 특별히 비명을 짓지 아니하고 누구의 비명을 쓴다 하랴.

 

 

 

▲ 봉분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이렇게 봉분 바로 앞까지 오를 수 있다.

 

 

 

 

 

이충무공 묘소는 장군의 부인과 합장되어 있는데, 봉분의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봉분 바로 앞까지 올라갈 수 있다. 봉분 앞으로는 비교적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동자상, 망주석, 문인석 등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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