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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정조의 꿈과 효심이 담긴, 수원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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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 팔달문의 옛 모습

 

​​▲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

 

 

​▲ 북수문(=화홍문) | 수원 화성에는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있다. 특히 북수문은 '화홍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으며 홍예로 된 수문 위에 누각을 지어 수원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꼽힌다.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수원 화성은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의 효심과 개혁 정신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성곽이다. 정조의 아버지는 제21대 왕인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이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당시 11살의 어린 나이에 불과했던 정조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776, 할아버지인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본래 경기도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시 동대문구)에 있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무덤을 당시에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던 경기도 수원부의 화산(현재 경기도 화성시)으로 옮기고 새롭게 단장하여 이름을 '현륭원'이라 하였다.

 

이후 효심이 깊은 정조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현륭원을 다녀갔다. 본래 현륭원이 있던 부근에는 관청을 비롯하여 여러 채의 민가들이 있었다. 정조의 명으로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이장하게 되면서 본래 이곳에 있던 관청과 민가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야만 했다.

현륭원이 들어서면서 화산 아래에 있던 관청과 민가를 현재 수원 화성 성곽의 일부인 팔달산 아래로 모두 이전시키고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킨 것이 바로 오늘날의 수원시가 된 것이다.

 

▲ 정조 어진(임금의 초상화) | 화성행궁 바로 옆의 화령전 안에 모셔져 있다.

 

​​▲ 팔달산 위에서 내려다본 화성 행궁의 전경

 

 

2. 수원 화성의 지리적 이점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인 현륭원(오늘날 경기도 화성시 융릉)에서 가까운 이곳 수원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농업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생산력이 증가하고,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서울(한양)과 지방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따라서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상업의 중심지가 필요한 시기였다. 당시에 수원은 서울과 그 아랫 지방을 연결하기에 알맞고, 서울에서 남쪽으로 크고 넓은 길을 내기에 좋은 지역이었다. 수원의 이러한 이점에 대해서는 이미 실학자였던 유형원이 주장한 바 있었다.

 

 

마침내 정조는 수원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정조가 수원에 신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또 다른 이유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정조가 왕위에 있던 당시에는 당쟁이 심하였고, 서인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정조는 서인들의 경제 기반인 서울의 상권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신도시를 계획한 것이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 서울 한양 도성의 숭례문에 버금갈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며 팔달문과 함께 수원 화성에서 가장 큰 문이기도 하다. 장안문(북문)뿐만 아니라 팔달문(남문), 창룡문(동문), 화서문(서문) 등 수원 화성의 4개 대문은 모두 옹성을 갖추고 있다. 

 

 

​▲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 

 

 

​​▲ 서북공심돈 | 공심돈(空心墩)이란 글자 그대로 '가운데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보통 성벽보다 높이 세워서 적의 움직임을 한눈에 살피고 적을 공격하기에 유리하게 만든 성곽 시설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원 화성에만 있는 건축물로, 화성에는 총 3개의 공심돈이 있는데 서북공심돈은 높이가 13미터에 이른다.

 

 

​​▲ 동북공심돈 | 서북공심돈과는 달리 마치 소라처럼 생겨서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 내부에는 소라처럼 생긴 나선형의 계단이 있어서 계단을 올라가 꼭대기에 이를 수 있다.

 

 

 

 

정조는 새로운 도시이자 성곽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짓고, 오늘날까지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정약용에게 축성(성을 쌓는 것) 계획을 세우도록 하였다. 또한 정조는 화성을 쌓기 전에 직접 팔달산에 올라가 성을 쌓을 자리와 도로, 민가 등이 들어설 자리를 살피기도 하였다.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총 책임을 맡아 진행된 대공사는 1794년부터 시작되어 불과 2년 만에 성곽이 완성되는 결과를 낳았다.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와 유형거를 비롯한 새로운 장비들이 성곽 공사에 많이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처럼 백성들을 모아서 강제로 노역을 시키지 않고, 일꾼들에게 정당하게 임금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일한 만큼 나라에서 돈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화성으로 몰려들기도 하였다.

 

 

 

봉돈 | 위급시에 불과 연기로 멀리 소식을 전하는 봉수대이다.

 

 

 

▲ 서장대(화성장대) | 장대란, 장수가 성의 높은 곳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곳이다. 화성에는 서쪽의 팔달산 위에 있는 서장대와 동쪽의 동장대, 2곳의 장대가 있다.

 

▲ 서포루 | 포루란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만든 방어용 시설로, 벽돌을 이용하여 3층으로 지은 건물 안에 화포나 총포를 숨기고 적을 공격하기 유리하게 만들었다. 수원 화성에는 모두 5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 누각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화성행궁의 정문 역할을 한다.

 

 

3. <화성성역의궤>와 수원 화성

 

 

이렇게 하여 완성된 화성은 방어의 목적만을 위한 단순한 성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교통, 주거 등 도시로서의 모든 기능을 고려하여 계획적으로 만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도시였다. 성벽의 총 길이는 5.7km이고, 100m마다 성문, 암문, 장대, 공심돈, 포루, 치성과 같은 수많은 방어 시설들을 만들었다.

 

특히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은 조선 시대 성곽에서 유일하게 화성에만 설치된 독특한 군사 시설이다. 화성에는 이러한 첨단 방어 시설, 군사적 시설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수원 화성은 완공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수해와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오늘날의 성곽은 여러 차례의 복구, 특히 1970년대에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복구되었는데 처음 지어질 당시와 겉모습에서 차이가 없다. 그 까닭은 화성을 지으면서 그 세세한 과정과 설계도를 모두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화성성역의궤>17941월부터 17968월까지 약 28개월 동안 수원 화성을 축성한 과정과 모든 사항을 그림과 글로 세세히 남겨놓은 조선왕실의 기록물이자 책으로 총 10권에 달한다. 이 책에는 축성 과정에 사용된 각종 건축물과 크기, 공사 방법, 담당 관청의 이름과 관원들의 이름, 일지, 각종 장계 등 보고서, 축성에 사용된 물품과 그 수량 등이 담겨져 있다. <화성성역의궤>가 남아 있기 때문에 수원 화성은 몇 차례와 화재와 수해, 그리고 전쟁 등을 겪으며 파괴되었어도 옛날 모습 그대로 복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수원 화성은 엄밀히 말해 읍성에 해당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어느 읍성보다 크고 견고하며 화려하다. 또한 수원 화성 안에는 화성행궁이 있는데 화성행궁은 다른 어느 행궁보다 규모가 크며 아름다우며 궁궐의 격식에 모자람이 없이 지어졌다. 그 까닭은 아무래도 정조가 자주 방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평상시에는 수원을 다스리는 관아로 사용되다가 정조가 아버지의 묘인 현륭원을 찾으러 능행차에 나서면 화성행궁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1795년에는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바로 이곳 화성행궁에서 열리기도 했다.

 

비록 20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녔지만 이미 화성의 가치와 중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인정받은 바 있다.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인 동시에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또한 수원 화성은 사적 제3호에도 지정되어 있다.

 

 

 

​​▲ 정조 대왕 동상 | 수원 화성의 화서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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