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최고의 명당에 자리 잡은 두 왕릉
▲ 융건릉 입구 | 사적 제206호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서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남긴 왕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뒤주(쌀과 같은 곡식을 담는 궤)에 갇혀 죽은 아버지(사도세자), 18세기 조선의 중흥을 이끈 개혁 군주, 새로운 신도시 수원 화성 건설, 규장각과 장용영 설치 등 ‘정조’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는 너무나 많고, 그래서인지 사극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융릉과 건릉은 이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많이 남긴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인 정조의 무덤이다. (사도세자는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훗날 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도 왕릉이 되었다.)
▲ 재실 |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 융건릉 안내도 | 왼쪽이 건릉(정조의 무덤), 오른쪽이 융릉(사도세자의 무덤)이다.
사적 제206호인 융릉과 건릉은 영조의 아들이자 뒤주 속에 갇혀 생을 마감한 비운의 세자인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인 정조의 무덤이다. 주소는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안녕동)으로, 화산(花山)이라는 작은 산 남쪽에 능이 있다.
수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화산(花山)은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동구릉),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경기도 여주)과 함께 조선 시대에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이자 명당으로 꼽히던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산의 형상이 마치 용이 여의주를 품은 것과 같다고 한다. (일반인이 봐서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융릉 앞에는 ‘곤신지’라는 둥근 모양의 작은 연못이 있는데, 둥근 여의주의 모양을 본떠 동그랗게 만들었다고 한다.
▲ 건릉으로 가는 길 | 좌우로 상수리나무가 우거져 있다. 도토리가 많아서인지 청설모를 쉽게 볼 수 있다.
▲ 융릉으로 가는 길 | 다른 왕릉들처럼 이곳에도 소나무가 많이 있다.
▲ 융릉 앞에 있는 연못(곤신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도세자의 무덤은 본래 경기도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터가 좋지 않다고 하여 왕위에 오른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오늘날의 화산으로 옮기고, 그 지역에(화산 근처) 살고 있던 백성들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수원 화성이다.
2.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무덤, 융릉
▲ 융릉
융릉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경의왕후(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으로 합장릉이다.
사도세자는 1736년(영조 12년)에 세자가 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영조의 진노를 사서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사도’라는 이름은 그가 죽은 뒤 영조가 내린 시호이며, 처음에는 현재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배봉산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때에는 ‘수은묘’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라는 이름으로 높여졌고, ‘수은묘’도 ‘영우원’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다. 1789년에는 현재의 위치인 화산으로 무덤을 이장하면서 ‘현륭원’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2년이 지난 1899년에 다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장조’로 높였고, 현륭원을 ‘융릉’으로 높여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왕릉이 되었다.
여기서 잠깐 무덤의 명칭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왕조의 무덤은 크게 ‘능-원-묘’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차이점은 이렇다.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 그 밖의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과 같이 묘(墓)라 부른다. 따라서 왕에서 쫓겨나 군(왕자)으로 격하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연산군 묘, 광해군 묘와 같이 부르고, 사도세자처럼 훗날 왕으로 추존된 사람의 무덤은 능이 된 것이다.
▲ 정자각 앞에서 바라본 융릉
▲ 융릉 능침(봉분)
사도세자의 무덤은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수은묘 → 영우원 → 현륭원 → 융릉’으로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비록 사후이지만 신분도 '왕족 → 세자 → 왕'으로 차례대로 격상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융릉은 조선의 왕릉 가운데 ‘능원묘’라는 세 가지 명칭을 모두 거친 유일한 무덤이기도 하다.
사도세자와 같이 묻혀 있는 부인 혜경궁 홍씨는 훗날 추존된 '경의왕후'라는 이름보다는 <한중록>의 작가인 혜경궁 홍씨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쓴 일종의 회고록이다. 이 책에는 그녀가 궁궐에 들어와 직접 겪었던 궁중 생활, 그리고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더욱 정성으로 모셨고, 그녀의 환갑을 맞아 새로 지은 수원 화성의 화성행궁으로 모시고 가서 성대한 환갑연을 치르기도 하였다. 이때 벌어진 잔치는 조선 왕실의 행사 중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크고 화려하게 치뤄졌다고 한다. 그녀는 아들인 정조가 죽은 뒤에도 15년이나 더 지난 후인 1815년(순조 15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에 남편의 무덤인 현륭원에 합장되었다.
3. 정조와 효의왕후의 무덤, 건릉
▲ 건릉
▲ 건릉과 정자각
건릉은 정조와 그의 비인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인 정조는 1759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1776년 즉위하여 1800년에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인 영조와 뒤를 이은 정조의 시대를 묶어서 흔히 ‘영정조 시대’라고도 부른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선생님께서 영정조 시대를 조선의 중흥기, 또는 르네상스 시대에 비유하신 적이 있다. 그만큼 영조와 정조 모두 개혁적인 정책을 펼친 군주로 꼽힌다는 뜻이리라.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화산으로 옮긴 후, 해마다 1월이나 2월에 참배하기 위하여 자주 수원 화성으로 행차하였다.
정조는 생전에 훗날 자신이 죽으면 아버지의 무덤 가까이에 묻어달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융릉 근처에 무덤을 만든 것이다. 처음에 정조의 능은 융릉의 동쪽 언덕에 있었지만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현재와 같이 융릉의 서쪽에 함께 모시게 되었다.
▲ 건릉 비각 안의 비문 | ‘대한 정조 선황제 건릉 효의 선황후 부좌’라고 쓰여 있는데, 나라 이름이 ‘조선’이 아닌 ‘대한’, 정조를 황제, 효의왕후를 황후로 나타냈다. 광무 4년인 1900년에 만든 비석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정조를 황제로 추존하였기 때문이다. (‘부좌(祔左)’는 부부를 합장할 때 아내를 남편의 왼쪽에 묻었다는 뜻임.)
융건릉에서 가까운 곳에는 용주사(龍珠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융건릉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정조가 화산으로 무덤을 옮긴 후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능사(陵寺)’이기 때문이다. 능사(陵寺)란 왕릉 주변에 세우는 절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왕릉을 관리하며 능을 지키는 사찰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원찰(願刹)’이라고도 함.)
당시에 절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하여 걷은 돈이 8만 냥이 넘었다고 한다. 절을 세우는 공사가 다 끝난 날 밤, 정조가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는 용의 꿈을 꾸었다고 하여 용주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용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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