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 문화유산

우리나라 천주교의 상징, 서울 명동성당

반응형

▲ 서울 명동성당(사적 제258호) | ​1898년 완성된 건축물로, 한국 천주교의 총본산이다.

 

 

 

1.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와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서울의 대표적인 번화가이자 항상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동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상징이자 총본산이다.

 

이쯤에서 잠시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는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1756~1801, 세례명 베드로)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훈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매부이기도 하다.

그는 1780년에 소과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길 포기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오가던 사신들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서학이란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서학을 공부하던 학자 중에 대표적으로 이벽(1754~1785)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처남이기도 했다(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은 이벽의 누이와 결혼함). 이승훈은 이벽을 통해 서학의 여러 문헌을 접하고 정약전, 정약용 등과 교류하며 천주교의 교리를 익혔다.

 

서양의 선교사가 파견되어 천주교가 널리 전파된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 달리,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는 서양의 선교사의 노력에 의해 전파된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학문으로서 연구되다가 교리를 받아들여 점차 신자가 늘어나는 매우 특이한 형태를 지녔다. 이승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1784년 동지사(청나라에 정기적으로 파견하는 사신)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한달 넘게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당시 북경에 머물던 프랑스인 선교사 그라몽(Gramont)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종탑 부분

 

 

그 후 약 100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들불처럼 일어나 수많은 교인들이 탄생하였고 수많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교세를 키워나갔다.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 천주교의 본산인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천주교를 믿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초창기에 그 나라에 파견된 서양의 선교사에 의해 직접적으로 천주교가 전파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우리나라 사람들 스스로 교리를 공부하고 깨달아 신앙을 갖게 되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 점에 대해 지난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당시 여의도 광장에서 순교자 103명을 성인으로 모시는 의식을 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직접 언급한 적이 있다.

 

“1784년에 여러분들의 조상은 자신들 중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좋은 씨앗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가톨릭 공동체였으며, 이 공동체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완전히 일반 신도들에 의해 시작된 유일한 공동체로서 독특합니다.”

 

 

 

2.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된 명동성당

 

조선 중기 이후 주로 명나라와 청나라를 오가던 사신을 통해서 서양의 천주교가 서학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이후, 명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과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1821~1846)가 선교 활동을 펼치거나 여러 교인들이 비밀리에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명동(明洞)’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에 이곳이 한성부(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에 해당)에 속한 행정 구역 중 하나인 명례방(明禮坊)에 속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명례방에서 자만 딴 것이다.

 

오랫동안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으며 조정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지만, 오히려 천주교의 신도 수는 크게 늘었다.

 

 

마침내 19세기 후반에 미국, 프랑스 등과 수호조약을 맺으면서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자, 한국 천주교는 1883년에 오늘날의 명동성당 터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성당이 자리잡은 언덕은 역관이자 1786년에 순교한 김범우(세례명 토마스)의 집이 있었는데, 김범우의 집은 최초의 천주교 예배가 열린 곳이라고 한다. 김범우는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 정약전 등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자체적으로 예식을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발각되어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이런 연유로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의 교구장이었던 블랑(1844~1890) 주교의 주도로 이 땅을 매입하였고, 마침내 성당 건설을 시작하였다.

 

 

 

▲ 측면에서 본 모습

 

 

 

 

성당의 공사는 1892년에 시작되었으나 조선 정부의 반대와 동학 농민전쟁, 청일 전쟁 등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6년 만인 1898년에 비로소 완공되었다.

 

설계자는 서울 중림동의 약현성당과 용산신학교를 설계한 코스트(Coste) 신부이다. 이렇게 하여 명동성당은 전체 길이가 68미터, 너비가 28미터, 지붕 높이가 23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성당 건축물로 탄생하였다.

 

건물 양식은 고딕 양식으로, 외벽은 붉은색과 회색의 벽돌로 되어 있다. 특히 종탑의 높이만 해도 47미터에 이르기 때문에 성당을 오르며 언덕 아래에서 바라보았을 때 더욱 높고 웅장해 보인다. 이 때문에 완공 당시에는 뾰족집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 후면에서 본 모습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산 역사이자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1970~80년대 군사 독재 시절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이 이곳에서 벌어졌고 민주화 열사들이 이곳에 몸을 숨기거나 성당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와 조작을 폭로했던 추모미사가 거행되었고, 6월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시위대의 은신처가 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열사들을 기리는 각종 미사들이 열렸다.

 

명동성당의 정식 명칭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명동교회, 사적 제258호에 지정되어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