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객사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3가 1번지에 있으며, 보물에 지정되어 있다.
1. ‘객사(客舍)’란 무엇일까
본래 ‘객사’란 나그네나 여행객이 묵는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객사는 조금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보통 나그네가 아니라 외국의 사신이나 왕의 명령을 받아 중앙에서 파견된 벼슬아치가 머무르는 곳을 뜻한다.
마치 오늘날 지방 곳곳에 도청이나 시청, 또는 구청과 같은 관공서가 있듯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도 각 지방을 다스리기 위한 행정의 중심 관청인 관아가 지방의 중심지 곳곳에 있었다.
관아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 바로 객사와 동헌이다.
동헌은 관아의 우두머리인 수령의 집무실을 말하는데, 대부분의 동헌은 객사의 동쪽에 지었기 때문에 ‘동헌(東軒)’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객사는 동헌보다 한 단계 격이 높은 건물로 여겨졌으며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다. 한 마디로 관아에서 제일 중요한 건물이었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어 내려온 관리는 이곳 객사에서 머무르며 임금의 교지를 전하였고, 또는 외국 사신의 연회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객사를 다른 말로 ‘객관(客館)’이라고도 불렀다. 객사는 단순히 사신이나 중앙 관리가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평상시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전패; 殿牌)를 모신 건물이기도 하였다. 관아에 근무하는 벼슬아치들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이곳에서 임금이 계신 대궐 쪽을 향해 예를 올려야 했다.
▲ 건물 뒤에서 바라본 전주 객사
▲ '풍패지관'이라고 써 있는 본관의 거대한 현판
2. '풍패지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
전주 객사는 조선 시대에 전주에 세워진 객사로, 세워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1473년(성종 4년)에 전주서고를 짓고 남은 재료로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보다 빠른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 객사는 ‘풍패지관(豊沛之館)’ 이라는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옛날 중국 대륙을 통일한 한나라 고조(유방)의 고향 이름이 바로 ‘풍패(豊沛)’이다. 그래서 전주를 대표하는 또 다른 문화재이자 옛 전주읍성의 남쪽 대문인 풍남문(豊南門)도 ‘풍패의 남쪽 문’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조선 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본관이 바로 전주이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를 한나라 고조에 빗대어 전주를 ‘풍패지향’이라고도 불렀다. 쉽게 말해 전주는 조선 왕조의 발원지로 여겨진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전주 객사에도 ‘풍패지관’이라는 고유한 이름이 붙여졌다.
▲ 본관의 넓은 회랑과 높은 지붕이 돋보인다.
오늘날 전주 객사에는 중심 건물인 본관과, 본관의 양 옆에 딸린 날개채(익헌), 객사를 지키던 수직사 등의 부속 건물이 남아 있다. 특히 본관의 한가운데에는 ‘풍패지관’이라는 거대한 현판이 위풍당당하게 걸려 있다.
안타깝게도 조선 시대의 각 고을에 있던 객사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또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대부분 헐리거나 사라졌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표적인 객사로는 전주 객사를 비롯하여 나주 객사(금성관), 강릉의 객사문(국보 제51호), 통영 객사(세병관), 여수 객사(진남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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