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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 서울 문묘와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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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같은 곳에 있는 문묘와 성균관

 

▲ 문묘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 | 공자와 여러 성인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문묘란 무엇일까? 문묘는 유교를 창시한 중국의 사상가인 공자와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한다. 문묘(文廟)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무덤을 가리키는 '()'가 아닌 사당을 가리키는 '()'이다.

 

중국에서는 공자를 가리켜 문()을 대표하는 성인이란 뜻으로 '문성인(文圣人)', 관우를 가리켜 무()의 성인이란 뜻으로 '무성인(武圣人)'이라고 부르는데, 따라서 공자의 사당을 문묘, 관우의 사당을 무묘라고 부른다. (현재도 서울 동묘에 남아 있는 동관왕묘가 바로 무묘이다.)

 

 

 

▲ 대성전 편액 | 조선 초기의 명필로 이름 높은 한호(한석봉)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통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은 나라였다. 그래서 공자의 사당인 문묘와 유학을 가르치는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이런 까닭에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을 세운 다음, 곧바로 문묘와 성균관을 세웠다(1398, 태조 7).

 

공자의 사당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선 것은 신라 때이다. 그 후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전국에 많은 문묘가 생겼다. 지금도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 230여 곳의 향교에 문묘와 명륜당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조선 시대 최고 교육 기관의 제도와 격식을 잘 보여 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그 건축물의 규모와 양식은 전국 각지에 세워진 향교의 모범이자 전형이 되었다.

 

현재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성균관대학교 정문 오른쪽에 있다.

문묘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는 제사를 올리는 구역(제례공간)이고, 명륜당과 동재,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공간(강학공간)이다.

보통 문묘라고 하면 제사를 올리는 구역만을 뜻하기도 하지만, 성균관과는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명륜당까지 포함한 전체 구역을 문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엄밀히 말해 문묘와 성균관은 다른 의미이지만 일반적으로 둘은 같은 의미로도 사용한다는 뜻이다.

 

 

 

▲ 성균관의 중심 건물인 명륜당 |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학 공간의 중심이다.

 

▲ 명륜당 편액​

 

▲ 동재

▲ 서재 | 동재와 함께 성균관 유생들이 생활하던 일종의 기숙사로, 명륜당 양쪽에 세워져 있다.

 

 

 

2. 대성전과 명륜당

 

문묘의 상징이자 제사 공간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자사, 증자, 맹자의 사성(四聖)과 그 제자들을 모신 전각이다. 최치원, 정몽주, 이황, 이이, 송시열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의 성현들의 위패도 이곳에 함께 모셔져 있다.

 

명륜당은 조선 시대 최고의 교육 기관인 성균관의 중심 건물이다. 대성전 북쪽에 있는 이 명륜당에서 약 200여 명의 유생들이 끊임없이 유학을 공부하였다. 명륜당 앞쪽에 좌우로 길게 펼쳐져 있는 동재와 서재는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기숙사로, 성균관 유생들은 나라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서 생활하며 공부하였다.

 

 

정록청 |  당시의 정사(政事)를 뽑아 보관하던 곳이다. 

 

존경각 | 도서를 보관하던 일종의 도서관 같은 곳이다.

 

 

 

 

성균관은 조선 시대 500년 역사에서 많은 정치인과 빼어난 학자들을 배출한 인재의 요람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들이 공부했으며 그들은 학문 연구는 물론 직접 벼슬길에 나아가 국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당쟁이 심해지자, 유생들 사이에서도 틈이 생겼다. 동재에는 소론, 서재에는 노론의 자제들이 나누어 머무르는 등 갈등이 생긴 것이다. 그러자 영조는 자신의 탕평책(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던 정책)을 널리 알리고, 장차 나라를 이끌어 갈 유생들에게 정치의 바른 길을 알려 주기 위해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우기도 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정문 바로 뒤에 남아 있는 탕평비가 바로 그것이다.

 

 

 탕평비 | 영조가 당쟁의 폐단을 막기 위해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린 글을 비에 새긴 것이다. 성균관 입구(현재 성균관대학교 정문)에 세워졌으며 위의 사진처럼 비각 안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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