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문(사적 제32호)
19세기 말, 일본과 러시아, 청나라 등 밀려오는 외세의 간섭으로 조선의 운명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서재필을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협회는 민중을 계몽시키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자주독립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펼쳤다.
서재필(1864~1951)은 1884년 김옥균과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등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3일 천하’로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학업에 전념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했으며, 미국 시민권까지 취득하기도 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나 역적이라는 죄명이 벗겨지자, 그는 1895년 말에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결정하고 <독립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1896년,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는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외세의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독립문을 세우기로 하였다. 독립문을 세우는 데 공감한 전국의 수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이 성금을 보내 뜻을 함께했다.
▲ 오늘날의 독립문
▲ 독립문의 옛 모습 | 오늘날에 비해 영은문 주초와 독립문 사이가 떨어져 있다.
▲ 독립관 | 옛날 중국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 자리에 세워졌다. 독립문이 세워질 때 독립관으로 바꾸어 토론회 등을 열기도 하였다. 일제에 의해 헐린 것을 다시 복원하였다. 현재는 순국선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순국선열 현충사'로 쓰이고 있다.
본래 독립문이 세워진 자리에는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이 있었다. 독립협회는 외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자주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독립’이란 말은 당시의 일본이 아닌 중국(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서재필은 1896년에 독립문을 만드는 취지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뜻을 밝힌 바 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1897년 11월, 높이 14.2미터, 너비 11.5미터의 거대한 석조문이자 자주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이 완공되었다. 서재필은 처음부터 독립문의 형상을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개선문을 본떠 만들기로 결심했는데, 단단한 화강암을 주된 재료로 하여 무지개처럼 홍예문으로 만들게 되었다. 문의 안쪽에는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으며,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위로는 태극기도 새겨져 있다.
지난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를 하면서 본래 세워진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70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겨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서재필 동상
▲ 독립문 앞에 있는 옛 영은문 주초(주춧돌)
영은문의 기둥을 세웠던 초석은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현재 독립문 바로 앞쪽에 남아 있다. 또한 중국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 자리에는 독립관을 세워 토론회를 열기도 하였다.
현재는 독립문과 독립관,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가 있던 이 지역 일대를 독립 공원으로 만들어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서 활용하고 있다.
▲ 서대문 형무소| 독립문 근처에 있으며, 일제가 독립운동을 벌인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곳이다. 현재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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