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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단종의 슬픔을 간직한, 청령포와 장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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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원도 영월에 유배된 어린 왕

▲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 지금도 배를 이용해야만 오고갈 수 있다.

 

 

▲ 단종이 청령포에서 머물렀던 집

 

▲ 단종이 한양을 그리워하며 돌로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망향탑

 

 

 

 

장릉은 조선의 제6대 왕인 단종(1441~1457)의 무덤으로, 현재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있다.

다른 조선 왕들의 무덤은 모두 서울이나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에 남아 있다. 그런데 단종의 무덤만은 서울에서도 너무나 멀리 떨어진 강원도에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불운한 왕이다(재위 1452~1455).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단종은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세종 대왕은 어린 손자가 걱정되어 생전에 여러 신하들에게 왕세손을 지켜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4대 왕인 세종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병약한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1452년 단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에 숙부인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모든 권력을 손 안에 넣었다. 단종은 이름뿐인 왕이 되었고, 결국 1455년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상왕으로 물러났다. 자신보다 무려 24살이나 많은 숙부의 상왕이 된 것이다.

 

 

이에 분개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사육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으나 발각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이것을 가리켜 '사육신의 난', '사육신 사건' 또는 '단종 복위 운동'이라고도 부른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사육신의 사당(의절사) | 사육신 공원 안에 있다.

 

 

 

 

2. 어린 왕의 슬픔을 간직한 장릉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14579, 또 다른 단종 복위 운동이 벌어졌다. 경상도에 유배되어 있던 노산군의 숙부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것이다(수양대군과 함께 왕위에 오를 경쟁자이기도 했던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은 계유정난 때에 이미 숙청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이에 단종은 노산군에서 아예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

 

 

단종이 유배되어 살았던 청령포는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으로는 험한 암벽이 솟아 있어서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는 섬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는 단종이 실제로 거처했던 집,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로 쌓았다는 망향탑, 노산대 등이 남아 있다.

 

 

단종의 죽음에 관하여는 몇 가지 다른 설이 있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조정에서 내린 사약을 가지고 금부도사가 영월에 도착하자 단종이 목을 매 자진했다고 되어 있다. 결국 단종은 겨우 17살인 1457년에 죽음을 강요받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어린 단종의 죽음 앞에서 누구도 함부로 슬퍼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수양대군(세조)에게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시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단종의 시신이 청령포 물 속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엄흥도란 사람이 현재의 장릉 자리에 몰래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단종의 무덤은 그렇게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59년이 지난 중종 11년이 되어서야 봉분을 갖추게 되었고, 숙종 24(1698)에 신위를 종묘에 모시고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조선의 왕릉은 원래 도성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조성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단종의 경우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가 폐서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훗날 다시 왕으로 복원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유일하게 도성으로부터 100리 이상 떨어진 왕릉이 되었다. 

▲ 단종의 무덤인 장릉 | 조선의 왕릉 중 유일하게 강원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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