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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선의 궁궐,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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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 본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다.

 

 

 

 

1. 정동에 자리잡은 궁궐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울시청과 마주 보고 있는 덕수궁은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이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때에는 임금이 임시로 사용하는 궁궐이었으며, 특히 조선 말기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뒤에는 황제가 머무르는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이었는데, 덕수궁이란 이름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나서 붙여진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비록 지금은 궁궐 안의 많은 건물이 사라지고 일부만 남았지만, 험난한 세월을 견디고 꿋꿋이 살아남아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또한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자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만 해도 덕수궁이 있는 지금의 서울 정동 일대는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과 선교사들이 모여들어 가장 빠르게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정동 곳곳에는 덕수궁 말고도 우리나라 근대 역사와 관련 있는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여기서 잠깐 정동(貞洞)’에 대해서 짚어 보자. 정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이곳에 옛날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에 정릉은 지금의 주한영국대사관 근처에 있었다.

 

신덕왕후 강씨의 쉽게 말해 이성계의 경처(京妻)로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었고, 신의왕후 한씨가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이자 향처(鄕妻)였다.

고려 시대에는 이와 같이 향처와 경처를 따로 두는 일종의 관습이 있었는데, 향처는 이름 그대로 시골의 부인, 즉 고향에서 결혼한 첫 번째 부인을 말하고, 경처는 서울, 즉 당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결혼한 두 번째 부인을 뜻한다. 고려 시대에는 첩 제도가 없었으므로 둘다 정실 부인에 속한다.

안타깝게도 조선 왕조를 개국할 당시 향처인 신의왕후 한씨는 세상을 떠난 후였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첫 번째 왕비가 바로 신덕왕후 강씨였다. 또한 신덕왕후 강씨는 평범한 부인이 아니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세도를 떨치던 권문세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남편인 이성계의 든든한 후원군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다. 또한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하는 데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정릉은 그런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으로, 1392년 조선왕조를 개국한 지 4년 만인 1396년에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성계는 크게 슬퍼하며 지금의 정동에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나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유명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신의왕후 소생인 다섯째 왕자 방원(훗날 제3대 왕 태종)이 주도한 이 정변은 처음부터 신덕왕후와 관련이 있었다. 신덕왕후는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을 제치고 자신이 낳은 여덟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방석이 조선의 첫 번째 왕세자로 지명되는 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에 분개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 특히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일으킨 사건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기 때문이다. 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왕세자였던 방석을 비롯하여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훗날 왕위에 오른 방원(태종)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인 태도 이성계가 죽자 신덕왕후의 신분은 왕비에서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을 당시 도성 밖이던 경기도 양주(현재 정릉의 위치인 서울 성북구)로 옮겨버렸으며,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흔적이 남지 않도록 했다. 또한 무덤의 석물들은 청계천의 광통교를 보수할 때 사용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지나다니면서 밟도록 한 것이다.

 

 

▲ 덕수궁의 정전(궁궐의 중심 건물)인 중화전 |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처럼 중요한 국가적 의식이나 조회를 열던 궁궐의 중심 건물이다. ‘중화(中和)’란 ‘중용(中庸)’에서 비롯된 말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란 뜻이다. 1902년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2층이었으나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된 이후 다시 지으면서 단층으로 만들었다.

 

 

 

2. 덕수궁의 간략한 역사

 

 

덕수궁은 본래 월산대군의 집터였다. 월산대군은 제7대 왕 세조의 아들인 덕종(추존 왕)의 맏아들로 제9대 성종의 친형이기도 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왕위에 오르지는 못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의 영향으로 도성 안의 모든 궁궐은 흔적도 없이 불에 타버렸다. 이에 따라 선조는 잠시 이곳 월산대군 집터에 거처를 마련하고 지냈는데, 이때에는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광해군 때에 이르러 이곳을 경운궁으로 불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경복궁에서 일어났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2월 새벽을 틈타 몰래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와 당시 정동에 있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 구 러시아 공사관 |  서울시 중구 덕수궁 뒤쪽의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옛 러시아 공사관 건물로, 사적 제253호에 지정되어 있다. 

 

 

 

아관파천 이후 약 1년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바로 근처에 있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고 칭제건원(왕이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사용함)을 추진하여 연호를 광무로 하였다. 바로 그해 189710월 고종은 마침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경운궁은 단순히 왕의 별궁이 아니라 황제가 머무르는 황궁이 된 것이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경운궁에는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하여 함녕전, 정관헌, 즉조당, 석어당, 석조전 등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대부분의 건물이 이때 지어졌다. 다른 궁궐과는 달리 석조전과 같이 서양식 건축물이 궁궐 안에 여러 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대한제국은 형식상 황제의 나라, 독립국임을 만방에 선포하였으나 이미 나라의 운명은 쇠한 지 오래되었다.

 

 

▲ 석조전 | 영국인이 설계한 화려한 석조 건물로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성되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미술관으로 사용되었고 광복 후에는 주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용되다가 2014년부터 역사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 정관헌 |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외국 사신을 만나는 등의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1900년에 지어졌다. 러시아의 건축가인 사바틴이 설계하였으며 화려하고 이국적인 서양식 건물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경운궁의 이름은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그 후에도 고종은 덕수궁에 계속 머물렀고 191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덕수궁은 주로 조선 말기이자 대한제국 시대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약 10년간 황제가 머무르는 궁궐이자 긴박한 상황이 끊이지 않았던 역사적 현장이다.

 

현재 덕수궁 안에는 궁궐의 정전(중심 건물)인 중화전, 서양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석조전, 고종 황제가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고 전해지는 정관헌, 정문인 대한문 등 대한제국과 관련된 많은 건물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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