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살문 | 각각의 왕릉 입구에도 홍살문이 있지만, 동구릉 매표소를 지나 들어가면 이와 같이 커다란 홍살문이 버티고 있다.
▲ 재실 |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하고 대기하는 곳이다.
▲ 동구릉 안내도 | 가장 안쪽에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 있다. 워낙 여러 왕릉이 있어서 관람을 할 때에는 동선을 잘 정해야 한다. 동구릉 매표소를 지나 재실이 나오면 왼쪽 길로 들어서서 맨 왼쪽부터 '숭릉 - 혜릉 - 경릉 - 원릉 - 휘릉 - 건원릉 - 목릉 - 현릉 - 수릉 - 재실' 순으로 시계 방향으로 관람하는 것이 좋다. 오르막이 거의 없고 평탄한 길로 되어 있어 걸어서 약 2~3시간 정도면 충분히 관람할 수 있다.
▲ 숭릉 | 18대 현종(1641~1674)과 원비 명성왕후(1642~1683)를 모신 쌍릉이다.
조선의 왕릉은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왕들의 무덤이다. 조선의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혼은 조선왕조의 사당인 종묘에 모셔지고, 육신은 왕릉에 묻혔다. 조선의 왕릉은 우리나라 다른 역대 왕조의 왕릉들과는 달리 엄격한 절차에 따라 조성되고 관리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조선의 왕릉은 모두 42기이다. 그중에서 제2대 왕인 정종의 무덤인 후릉(정종과 그의 왕비 정안왕후의 능)과 제릉(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의 능)은 북한 땅에 있어서 이 2기를 제외한 총 40기가 남한에 있다. 지난 2009년 남한에 있는 조선의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울에서 조선 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대부분 순탄한 편이다. 조선의 왕릉은 한양 도성으로부터 10리 밖 8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조성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서울시 안이나 경기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은 자가용이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도 수월하게 찾아갈 수 있는 편이다.
도성으로부터의 거리는 그 옛날 임금이 왕릉을 참배하러 갈 때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강원도 영월의 장릉(6대 단종의 무덤)과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 그리고 여주에 있는 영녕릉(4대 세종과 17대 효종의 무덤)은 도성으로부터 80리 이상 떨어져 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인창동)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은 9개의 조선 왕릉이 모여 있는 곳으로, 한양 도성의 동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적 제193호에 지정되어 있다.
동구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 가장 큰 왕릉군을 이루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를 개국한 첫 번째 왕,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이 있어서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동구릉으로 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은 청량리역이나 잠실역에서 구리시 동구릉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방법인데, 버스 정류장 이름도 "우리나라 최대의 왕릉군인 동구릉"이란 아주 긴 이름으로 되어 있다.
동구릉에 있는 9기의 왕릉은 다음과 같다.
◆ 건원릉: 제1대 태조의 능
◆ 현릉: 제5대 문종과 왕비 현덕왕후의 능
◆ 목릉: 제14대 선조와 왕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
◆ 휘릉: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
◆ 숭릉: 제18대 현종과 왕비 명성왕후의 능
◆ 혜릉: 제20대 경종의 왕비 단의왕후의 능
◆ 원릉: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
◆ 수릉: *문조(추존)와 신정왕후의 능
◆ 경릉: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및 계후 효정왕후의 능
*문조(1809~1830)는 제23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른 후 익종으로 추존되었다. 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로 다시 추존되었다.
▲ 혜릉 | 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심씨(1686~1718)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경종이 즉위하기 전, 세자빈일 때 세상을 떠났으며,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로 추존되었다.
▲ 경릉 | 24대 헌종(1827~1849)과 원비 효현왕후(1828~1843), 계비 효정왕후(1831~1904)를 함께 모신 능이다.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3기의 봉분이 나란히 놓인 삼연릉(三連陵)이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의 왕실 가족 무덤은 총 119기이고, 그중에서 왕릉(왕과 왕비의 무덤)은 총 42기(추존 왕릉 5기 포함), 원이 13기, 묘가 64기이다. ‘능원묘’의 차이점도 이미 다른 왕릉을 포스팅하면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500년 이상 지속된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잘 보존되어 있는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왕비 신의왕후의 무덤)과 후릉(2대 정종의 무덤)를 제외한 조선의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다.
조선 시대에 왕이 세상을 떠나면 <국조오례의>에 따라 3년에 걸쳐 긴 국상의 절차가 진행되었다. 몸은 왕릉에 묻히고, 혼은 신주(위폐)에 깃들어 다른 왕들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모시게 되는 것이다.
▲ 원릉 | 21대 영조(1694~1776)와 계비 정순왕후(1745~1805)를 모신 쌍릉이다.
▲ 휘릉 | 16대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1624~1688)의 능이다.
조선의 왕릉은 <주례(周禮)>를 바탕으로 하여 서울(한양 도성)을 중심으로 거리와 풍수지리적 입지를 고려하여 자리가 결정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왕의 무덤은 당대 최고로 꼽히는 명당에 자리 잡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간혹 이미 만들어진 왕릉이 풍수상 길지가 아니란 이유로 옮겨지기도 하였는데 정치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도 꽤 있었다.
동구릉은 1408년(태종 8년)에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면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본래 이성계는 자신이 사랑한 계비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에 함께 묻히길 원하였다. (정릉은 본래 서울 덕수궁 뒤편 주한영국대사관 근처에 있었으나, 3대 임금인 태종이 현재의 정릉동으로 강제로 이장시켰다. 덕수궁 근처의 정동이라는 이름도 정릉이 있던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신덕왕후를 미워했던 태종(이방원)이 그 소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자, 이성계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고향인 함흥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 건원릉 | 동구릉을 대표하는 왕릉이자, 이곳에서 가장 큰어른인 태조 이성계의 능이다.
▲ 건원릉 정자각 | 1408년 태종 8년에 건원릉과 같이 지어졌으며, 조선의 왕릉에서 정자각의 표본으로서 그 역사적, 상징적 의의가 크기 때문에 보물 제1741호에 지정되어 있다.
▲ 정자각에서 바라본 건원릉 봉분 | 멀리서도 봉분에 입혀진 억새풀이 잘 보인다.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무덤을 함흥에 만들자니 한양 도성에서 너무 멀어 적당하지 않았고, 그토록 미워했던 신덕왕후 곁에 모실 수도 싫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태종의 명으로 궁궐에서 80리 안의 명당을 찾도록 하였다.
마침내 조정 대신 김인귀가 먼저 찾아 풍수에 밝은 하륜이 직접 명당임을 확인한 후 능지로 정한 곳이 바로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 검안산 부근이다. 명나라 사신도 이곳을 보고 “어찌 이런 곳이 있단 말인가?” 하고 감탄할 정도로 빼어난 명당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건원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봉분에 잔디 대신 억새풀이 심어져 있다. 태종이 아버지를 위해 함흥에서 가져온 흙과 억새로 봉분을 덮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오늘날에도 건원릉의 봉분에는 억새풀이 심어져 있다.
▲ 목릉 | 14대 선조(1552~1608)와 원비 의인왕후(1555~1600), 계비 인목왕후(1584~1632)의 능이다. 서쪽 능침이 선조, 가운데 능침이 의인왕후, 동쪽의 능침이 인목왕후의 무덤이다. 같은 주산에서 내려온 능산에 각각 봉분을 만든 동원이강형 능이다. 위 사진에서 정자각 뒤로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침,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의인왕후의 능침이다.
▲ 목릉 | 의인왕후의 능침
▲ 목릉 | 인목왕후의 능침
동구릉은 조선 왕릉을 대표하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2기의 조선 왕릉 중 약 20%에 해당하는 9기의 왕릉이 한곳에 모여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이곳에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이렇게 많은 왕릉이 모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주산에 해당하는 검안산이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를 지니고 있는 풍수리지상 최고의 명당으로 꼽혔기 때문이다. 동구릉을 찾으면 여러 왕릉이 모여 있으므로 각각 조성된 시기가 달라 시대별로 조금씩 달라진 왕릉의 형식도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 수릉 | 24대 왕 헌종의 아버지인 추존왕 문조(1809~1830)와 신정왕후(1808~1890)의 합장릉이다. 문조는 23대 왕 순조의 맏아들로 ‘효명세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신정왕후 조씨는 철종이 죽자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을 왕위에 앉힌 ‘조대비’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 현릉 | 5대 문종(1414~1452)과 현덕왕후(1418~1441)의 능으로,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현덕왕후는 왕비가 되기 전에 단종을 낳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 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제국의 상징, 환구단 (0) | 2023.08.08 |
---|---|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사직단(社稷壇) (0) | 2023.08.08 |
한성 백제 시대의 무덤군, 서울 석촌동 고분군 (0) | 2023.08.06 |
조선의 궁궐, 덕수궁 (0) | 2023.08.06 |
조선의 왕릉, 김포 장릉 (0) | 2023.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