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무덤
▲ 김포 장릉(사적 제202호) | 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 왕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이다.
조선의 왕릉 42기 중에는 ‘장릉’이란 이름을 가진 능이 3개나 있다.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16대 인조와 인열왕후의 무덤),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莊陵:6대 단종의 무덤), 그리고 지금부터 살펴볼 경기도 김포의 장릉(章陵)이다.
김포에 있는 장릉은 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 왕 원종과 부인인 인헌왕후의 능이다. 흔히 다른 장릉과 구분하기 위해 ‘김포 장릉’이라고 부른다.
사적 제202호에 지정되어 있는 김포 장릉은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16대 왕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추존 왕)과 부인의 무덤이다.
▲ 김포 장릉 재실 | 재실은 평상시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의 거처로 쓰이고,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며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보통은 '원종'이란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14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원종(1580~1619)은 생전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들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추존된 왕이기 때문이다.
생전에는 왕자의 신분이었으므로 ‘정원군’이라고 불렸다.
‘대군’이 아닌 ‘군’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비(정실)의 소생이 아닌 후궁 인빈 김씨의 소생이다. (광해군도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이다)
다시 말해 정원군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이다.
정원군(1580~1619)은 어렸을 때부터 심성이 곧고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피난길의 선조를 줄곧 모시며 따라다녔다. 그 공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4년에 공신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정원군의 부인인 인헌왕후(1578~1626)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590년에 정원군과 혼인하였고, 훗날 인조가 되는 첫째아들 능양군을 비롯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
▲ 김포 장릉
2. 선조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난 원종
조선 개국 초기에 일어났던 ‘왕자의 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 시대의 왕들에게 왕자란 존재는 피를 나눈 형제이면서 동시에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흔히 역모가 일어나면 항상 왕족 중에서 한 명을 왕위로 내세우는 법이다.
광해군에게 있어 이복동생인 정원군도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같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형(임해군)도 훗날 살해할 정도로, 왕위 앞에서는 형제의 정도 소용없는 법이다. 더군다나 정원군의 생모인 인빈 김씨는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의 숙적이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최악의 왕이 바로 선조라고 생각한다.
최초의 방계(傍系) 출신 왕이라는 콤플렉스에 찌들어서 툭하면 선위 소동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신하들 사이를 갈라놓고 자신의 왕권을 다지고자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에게는 끝까지 항전의 의지를 설파하고 뒤로는 혼자 살겠다고 밤중에 몰래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그것도 모자라 한강의 나룻배까지 다 불태웠다.
심지어 의주에 이르러서는 아예 명나라에 망명하려고까지 했다. (불행히도 명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지만)
광해군은 그 무능하고 변덕스러운 아버지 선조 밑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그것은 전란의 수습을 떠맡기고자 임시로 정한 세자 자리였다. 당시까지 선조에게는 적자(정실의 아들)가 없었고, 후궁 소생 중에서 장남인 임해군(첫째아들)이 워낙 성격이 포악하고 자질이 떨어졌기 때문에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가 돌아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중에 무능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분조를 이끌며 전란을 수습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광해군은 왕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충분히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선조는 늘 광해군을 못마땅해하고 심지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상대로 여기며 극도로 경계하기도 하였다. 잇달아 선위 파동을 일으킨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 비각 | 비각 바로 옆에 인헌왕후 육경원 비석 받침돌이 있다.
▲ 수복방 | 제사에 쓰이는 그릇을 보관하고, 능을 지키는 관리나 노비들이 지내던 곳이다.
급기야 1606년, 선조의 유일한 적자(정실인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광해군은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 자리까지 크게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1608년). 이때 영창대군은 불과 2살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에 실질적으로 조정을 잘 이끈 광해군은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선조의 뒤를 이어 무사히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겨우 왕이 된 광해군에게 어느 날 괴이한 소문이 들렸다.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
정원군의 집터는 현재 광화문 네거리 서쪽에 있었는데, 서울역사박물관 뒤의 경희궁이 자리 잡고 있는 바로 그곳이다.
그런데 정원군의 셋째 아들인 능창군이 어릴 적부터 담대한 성격에 용모가 빼어나고 무예까지 뛰어나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당연히 광해군은 능창군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장차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존재로 여긴 것이다.
때마침 1615년(광해군 7년)에 '신경희 옥사 사건'(=능창군 추대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누군가 고변하기를 능창군이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신립 장군의 조카임) 등의 추대를 받아 왕위를 노린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지체 없이 신경희를 붙잡아 장살(杖殺)에 처하였고,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 기록에는 능창군이 유배 생활 동안의 학대와 고난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되어 있으나 사람을 시켜 능창군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후 광해군은 2년 뒤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정원군의 집을 몰수하여 그곳에 새로운 궁궐을 지어 버렸다. 그 궁궐이 바로 지금의 ‘경희궁’이다.
※참고: 경희궁 → https://sasavi.tistory.com/73
3. 사후에 왕(원종)이 되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다른 형제들(임해군, 영창대군)이 죽어 나가자 새 왕(광해군)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정원군은 안 그래도 몸가짐을 조심하고 대외 활동을 자제하면서 조용히 지내던 차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셋째 아들인 능창군이 역모에 몰려 유배지에서 목숨까지 잃었고, 이제는 멀쩡한 집까지 빼앗겨 버렸으니 그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였을까?
광해군이 또 언제, 어떤 죄목으로 자신이나 혹은 아들들의 목숨을 빼앗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원군은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더욱더 몸을 사리며 죽은 듯이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록인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정원군이 말하길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히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 처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619년, 홧병에 시달리고 술로 세월을 보내던 정원군은 39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4년 뒤인 1623년, 셋째 아들이 아닌 맏아들 능양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16대 왕 인조이다. 정원군 집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은 이렇게 현실이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아버지를 추존하기 위해 10년이나 노력하였다. 마침내 정원군은 사후에 추존 왕 ‘원종’이 되었다. 평생을 가슴 조리며 살았던 아버지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 준 것일지도 모른다.
▲ 인헌왕후 육경원 비석 받침돌 | 1626년 인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만든 무덤이 육경원인데(왕후로 추존되기 전), 육경원 때의 비석 받침돌이 남아 있다.
정원군의 무덤인 흥경원(興慶園)은 처음에 경기도 양주군 곡촌리에 있었다. 그후 세상을 떠난 부인 인헌왕후의 무덤인 육경원(毓慶園)이 경기도 김포 성산 언덕에 있었기 때문에 인조는 아버지의 무덤도 김포로 옮겨 쌍릉 형식으로 만들었다.
1632년에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무덤도 흥경원에서 장릉(章陵)으로 격상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1626년(인조 4년): 어머니(인헌왕후)가 세상을 뜨자 현재 자리에 안장. '육경원'이라 부름.
- 1627년(인조 5년): 경기도 양주 곡촌리에 있던 아버지(정원군)의 무덤(흥경원)을 현재 자리로 옮기고, 부부의 무덤을 쌍릉으로 만든 후 '흥경원'이라고 합하여 부름.
- 1632년(인조 10년):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존됨. 흥경원을 장릉으로 높이고 석물을 왕릉에 맞게 고쳐 세움.
▲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약간의 오르막 경사가 있어 참도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 김포 장릉 봉분(능침) | 사진 왼쪽이 원종의 능, 오른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봉분이 각각 있는 쌍릉 형식이다.
원종과 인헌왕후의 무덤인 김포 장릉은 김포시청 뒤로 난 언덕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찾을 수 있다.
김포 장릉에서 특이한 점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경사가 있기 때문에 참도가 마치 계단처럼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또한 1626년 인헌왕후의 무덤인 육경원을 만들 때에 비석을 세우기 위해 만든 비석 받침돌이 비각 옆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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