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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재, 풍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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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남문 | 옛 전주읍성의 남쪽 대문으로, 보물 제308호에 지정되어 있다.

 

 

1.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

 

현재 전라북도의 도청 소재지인 전주는 예로부터 전라도의 중심지였다. 전라도라는 이름 자체가 전주와 나주를 합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전라도 전역에서 나주와 함께 가장 큰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삼국 시대에는 백제가 이 땅을 차지하여 완산(完山)’이라고 불렀다가 통일 신라 시대에 현재와 같이 전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후삼국 시대에는 견훤이 이곳 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백제를 건국하기도 하였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고 전국을 8도로 나누어 지역마다 감영을 세워 관찰사를 파견하였다. 이리하여 경기감영, 충청감영, 전라감영, 경상감영, 황해감영, 강원감영, 평안감영, 함경감영 등 8개의 감영이 생겼는데, 이중에 전라감영이 바로 전주에 세워졌다. 오늘날로 치면 8도의 감영은 도청 건물, 관찰사는 도지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성문인 풍남문은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옛 전주읍성의 남쪽 대문이다. 읍성이란 옛날 지방 행정의 중심지가 되는 고을을 둘러쌓았던 성을 말한다. 풍남문은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대문이었던 셈이다. 옛날에는 전주읍성에도 동서남북 방향으로 모두 성문이 있었고 성곽도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풍남문만 남아 있다.

 

 

 

1930년대 풍남문의 모습​

 

​▲ 경기전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이다.

 

​​▲ 태조 이성계 어진(국보 제317호)

 

 

 

전주는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깊은 도시이다. 이성계의 본관이 전주였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왕의 고향이자 왕조의 발상지로서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경기전(사적 제339)도 바로 이곳 전주에 있다.

 

전주읍성은 조선 초부터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에 모두 파괴되거나 불에 타 사라졌다. 전주읍성의 성곽과 문을 다시 지은 것은 영조 때인데 이때 남문의 이름은 명견루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명견루 역시 화재로 불타버렸다. 그리고 이듬해에 관찰사인 홍낙인이 다시 문루를 지어 오늘날과 같이 풍남문이란 이름을 붙였다.

 

 

 

2. 풍패의 남쪽 대문, 풍남문

 

 

풍남문은 조선 영조 때인 1767년에 화재로 불탄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풍남이란 풍패의 남쪽에 있는 문이라는 뜻인데, 풍패는 한나라 고조인 유방의 고향이다. 전주를 한나라 고조의 고향인 풍패에 빗대어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성문 위에 있는 문루 남쪽에는 풍남문’, 북쪽에는 호남제일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서 이곳이 전라도를 대표하는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풍남문에서 가까운 곳에 경기전과 전동성당, 오목대, 그리고 전주객사 등의 문화재가 모여 있다.

 

풍남문은 수원 화성을 제외하고 오늘날 남아 있는 읍성의 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석축으로 된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 2층으로 된 문루가 세워져 있는데 문루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팔작지붕이란 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지붕을 말하는데, 맞배지붕과 우직각지붕을 합한 형태로 건축물의 지붕 양식으로 가장 화려하다. 주로 건물의 규모가 크거나 격식을 차릴 때 사용하며 사찰의 대웅전과 같은 중심 건물이나 궁궐에 많이 사용되는 편이다.

또한 성문 남쪽으로 옹성까지 갖추고 있는데, 여러 면에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 풍남문 북쪽 현판 | '호남제일성'이라고 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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