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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강화도를 지켰던 군사 시설, 초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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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시대의 군사 요새

 

▲ 초지진 성벽

 

 

▲ 초지진 입구

 

 

 

 

사적 제225호에 지정되어 있는 초지진은 강화도에 있는 조선 시대의 군사 요새이다.

 

옛날부터 강화도는 바다를 통해 한강을 따라 서울(한양)로 침입하는 적을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강화도 곳곳에 군사 요새가 세워졌다.

 

초지진이 처음 세워진 때는 효종 때인 1656년이다. 그후 숙종 때인 1679년에 성곽으로 개보수되었다.

 

초지진은 강화 12진보 중 하나이다.

조선 후기에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5개의 진()7개의 보()가 설치되었는데 이를 합하여 흔히 강화 12진보라고 한다. 각각의 진이나 보마다 수 개의 돈대도 설치되었다. 여기서 돈대란 평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세우는 군사시설로 적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거나 포를 설치하는 곳을 말한다. 강화도에는 총 53개의 돈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 대포를 보관하고 있는 포각

 

 

​▲ 포각 안의 대포 | 조선 후기에 사용되었던 실물 대포이다.

 

 

 

 

2. 강화도의 중요성

 

 

강화도는 우리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강화도에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그 증거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고인돌(지석묘)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도는 지리상 한강의 관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삼국 시대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와 고구려가 치열하게 싸웠다.

고려 시대에 강화도는 역사의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강화도는 서울뿐만 아니라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도 가깝고 고려 시대 무역의 중심지인 벽란도의 입구와도 같은 곳이었는데, 특히 몽골이 침입하자 아예 도읍을 이곳 강화도로 옮겨서 몽골과 끝까지 맞서기도 하였다. 이때 강화도에 왕궁(강화궁지)과 성곽(강화산성)이 지어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고려왕조가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에는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대몽항쟁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강화도는 육지에서 가깝지만 엄연히 바다를 낀 섬으로 특히 물에 약한 북방 민족의 침입 때마다 왕조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에도 강화도의 중요성은 여전하였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 국토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을 때도 강화도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조선 후기 들어서 후금이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에는 미처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에 큰 수모를 겪은 조성왕조는 효종 때에 이르러 북벌을 목표로 삼아 국방을 크게 강화시켰는데, 이때 강화도에 많은 진, , 돈대가 설치되었다.

 

▲ 성벽에 남아 있는 포탄 자국

 

 

 

 

초지진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해안가에 세워져 있으며, 현재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곽의 둘레가 500미터가 채 안 되는 작은 방어 시설에 불과하지만, 조선 말기인 19세기 말에 병인양요,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 사건 때에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때마다 초지진의 관군은 외국 함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생긴 포탄 자국 등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70년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성곽 안에는 정면 1, 측면 1칸의 포각을 만들어 그 안에 조선 시대 후기에 사용되었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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