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전도비 | 사적 제101호에 지정되어 있으며, 위치는 서울시 송파구 잠실역 근처 롯데월드 앞 석촌호숫가에 있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가 청 태종에게 굴복하면서 청의 요구에 따라 청 태종의 공덕을 적어 1639년에 세운 비석이다. 삼전도비의 본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높이가 약 4미터에 이르며, 비석의 앞면에는 만주 글자와 몽골 글자가, 뒷면에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 새겨진 것은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을 공덕으로 미화시켜 찬양한 내용 등이다. 현재 사적 제101호에 지정되어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병자호란이라는 사건이 있다. 병자호란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자.
여진족은 일찍이 중국 대륙의 동북쪽과 한반도의 북쪽 지방, 주로 만주 지역에 살던 민족이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는 ‘숙신’이라고 불렸고,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는 ‘말갈’로 불리기도 했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 ‘여진’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훗날 ‘만주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여진은 고려를 상국(上國)으로 섬겼다. 그러다가 점차 세력이 강해지자 고려의 북방 국경 지역까지 침범하였다. 이에 고려의 윤관 장군은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족을 정벌하고 그 유명한 ‘동북 9성’을 쌓아 고려의 북쪽 국방을 튼튼히 했다. 그 후 12세기 초에 다시 여진족의 세력이 강성해져서 ‘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금나라는 요나라를 정벌하고 중국의 송나라를 크게 위협할 정도로 강성해졌지만 13세기에 이르러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받고 건국한 지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금나라가 멸망하자 여진족은 여러 개의 부족으로 흩어졌고 조선 초기만 해도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에서 이따금 소란을 피웠지만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원병을 보냈던 명나라의 국력이 크게 쇠하게 되었다. 여진족은 이런 정세를 틈타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부족장이었던 누르하치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여 여진족 전체를 통일하였고 1616년에는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후금이란 이름은 옛날 여진족이 세웠다가 몽골 제국에게 멸망한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선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왕이 된 광해군은 새롭게 일어난 후금과 전통적인 사대 관계였던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새롭게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크게 변화하였다.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서인 세력이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인조와 함께 새롭게 들어선 서인 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에 반발한 후금의 태종이 조선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신하였다가 간신히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고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은 명과의 외교관계를 지속하였고 후금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청 태종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다시 한번 조선을 침략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1636년 12월).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쏜살처럼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숭례문으로 도성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하려 했지만 청나라 군대가 이미 강화도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남한산성에 들어가 40일 동안 항전하며 버티던 인조는 결국 청나라 군대가 머물고 있던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 가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올렸다. 이것을 가리켜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부른다.
인조는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굴욕적인 강화 협정을 맺고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을 세워야만 했다. 이것이 오늘날에 남아 있는 삼전도비이다.
삼전도는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 부근인 석촌호수 근처인데, 조선 시대에는 한양 도성에서 송파에 이르는 나루터였다.
실제로 이곳에는 1950년대까지도 나룻배가 다녔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한강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참고로 ‘삼전도(三田渡)’라는 명칭에서 ‘도(渡)’는 섬이 아닌 나루터란 뜻이다.
▲ 삼전도비 이전 안내문
어떻게 보면 삼전도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해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중국 대륙의 새로운 패자가 된 청나라였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삼전도비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인 고종 때에 이르러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청의 세력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급격히 약해지게 되었다.
이에 고종에 명에 따라 1895년(고종 32년)에 비석을 강물 속으로 쓰러뜨렸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세웠다가 1956년에 다시 땅에 묻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3년에 홍수로 인해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1980년대에 인근의 송파대로를 확장하면서 석촌동의 주택가 공원에 세웠다가, 현재에는 본래 삼전도의 위치인 잠실 롯데월드 근처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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