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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선의 왕릉, 헌인릉(헌릉과 인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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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릉 | 조선 3대 왕 태종과 왕비인 원경왕후의 능으로, 봉분이 각각 있는 쌍릉 형식이다.

 

 

 

 

 

헌인릉은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조선의 왕릉으로, 헌릉(3대 왕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의 능)과 인릉(23대 왕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의 능)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사적 제194호에 지정되어 있다.

 

 

우선 헌릉은 조선 제3대 태종과 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이다.

합장릉이 아닌 봉분이 각각 있는 쌍릉으로 되어 있다. 조선의 왕릉이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시대에 따라 조금씩 그 형식이 달리 조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헌릉을 보면 조선 초기의 왕릉 양식을 알 수가 있다.

 

우선 봉분의 크기가 다른 왕릉에 비해 매우 크다. 게다가 석물의 크기도 매우 크고 문인석과 무인석이 2쌍씩 세워져 있다. 다른 왕릉보다 1개씩 더 있는 것이다.

 

 

조선의 3대 왕인 태종(1367~1422)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이방원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왕자 시절에는 정안군으로 불렸다. 그는 조선 왕조를 개국하는 데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으며, 고려 왕조를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한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정몽주와 주고받은 시조 하여가단심가가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 왕조가 개국한 후 태종 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친 이른바 왕자의 난을 통해 여러 형제 사이에서 권력을 잡고 결국 왕위에 올랐다. 그는 조선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여러 정책을 펼쳤다. 특히 사병을 혁파하고 국방력을 강화했으며,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숭유척불 정책을 실시하여 사찰을 정리하고 호패법을 실시하고 신문고를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공신과 외척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는데, 이러한 태종의 노력이 있었기에 다음 왕인 세종 때에 이르러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태종 이방원과 함께 헌릉에 묻힌 원경왕후 민씨(1365~1420)는 태종의 왕비로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그리고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을 낳았다. 그녀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으며 집안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권문세가 중 하나였다. 그녀는 남편인 이방원의 정치적 동지이자 조언자였으며 1,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이방원의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과 함께 남편을 도와 권력을 장악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서 신덕왕후(1대 태조의 비), 문정왕후(11대 중종의 비)와 함께 가장 정치색이 강했던 왕비로 평가받는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아들인 제4대 왕 세종은 효성이 지극하여 죽어서도 부모님의 무덤 근처에 묻히기를 바랐다. 이에 따라 1450년 승하한 세종의 무덤은 처음에 헌릉의 서쪽 근처에 조성되었으나, 이곳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하여 1469(예종 1) 현재 위치인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다. 초창기 세종의 무덤에 쓰였던 비석과 석물 등은 현재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져 있다.

 

 

 

▲ 인릉 | 조선 23대 왕 순조와 왕비인 순원왕후의 능

 

 

 

인릉은 제23대 순조와 왕비인 순원왕후의 능이다. 봉분은 하나로 순조와 순원왕후를 함께 모신 합장릉이다.

 

순조는 1790(정조 14)에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인 정조가 승하하자 1800년에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영조의 왕비였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재임 기간에 홍경래의 난(1811)이 일어났고, 이른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183411월에 승하하였으며 처음에는 경기도 파주 교하 부근에 장사를 지냈으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1856년에 현재 위치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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