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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조선의 왕릉, 태강릉(태릉과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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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무덤인 태릉

 

 

 

 

서울에서 태릉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국가대표 선수촌이 있던 태릉 선수촌이 떠오르곤 한다. 또한 태릉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잡고 있는 태릉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계비(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이자 13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무덤이다. 그리고 태릉에서 동쪽 언덕으로 이어져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제13대 왕이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과 그의 비인 인순왕후의 무덤인 강릉이 있다.

 

 

이 두 왕릉, 즉 태릉과 강릉을 합쳐서 태강릉이라고 부른다. 태릉과 강릉은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의 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 태릉의 소나무 숲은 역사가 깊고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태릉 

 

 

 

 

태릉의 주인인 문정왕후는 우리나라 역사상 고려의 천추태후와 함께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파평 윤씨 가문에서 태어난 문정왕후는 중종의 세 번째 왕후이다. 11대 왕 중종의 첫 번째 왕후인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부인이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역적의 딸이란 이유로 바로 폐비가 되었고, 둘째 왕후인 장경왕후 신씨가 1515년에 죽자, 1517년 문정왕후가 세 번째 왕비이자 두 번째 계비로 간택되어 책봉되었던 것이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는 대비가 되었고, 중종의 뒤를 이은 12대 왕 인종이 불과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자신이 낳은 아들 경원대군(명종)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게 된 문정왕후는 남동생인 윤원형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이라고 불리는 윤임 일파를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여기서 수렴청청( 垂簾聽政)이란 글자 뜻 그대로 발을 드리우고 그 뒤에서 정치를 듣는다.’라는 말인데, 나이가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왕대비 또는 대왕대비가 국정을 맡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왕조에서는 총 8번에 걸쳐서 수렴청정이 이루어졌는데 문정왕후는 그중에서도 가장 긴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고, 문정왕후만큼 수렴청정 기간에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 적도 없었다. 그녀는 수렴청정이 끝난 이후에도 아들인 명종을 대신하여 실질적인 권력자 역할을 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문정왕후는 약 20년 동안 권력을 놓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아무리 임금의 어머니이자 실질적인 권력자이지만 숭유억불이 국시였던 조선에서 여인이 권력을 틀어쥐고 불교를 장려하는 모습이 신하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불교를 부흥시키는 여러 정책을 펼치자 이를 반대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그녀는 신하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승려인 보우를 데려와 봉은사(현재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의 주지로 임명하고 불교와 관련된 여러 정책을 펼쳤다. 도첩제(출가한 승려의 신분을 국가에서 공인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전국의 300여 개의 사찰을 공인하였으며, 여러 불교 행사를 열었다.

 

 

 

​▲ 태릉의 정자각 | 다른 왕릉의 정자각에 비해 비교적 크다.

 

​▲ 정자각 뒤로 보이는 능침과 석물

 

 

▲ 태릉 | 봉분의 주변의 석물들이 다른 왕릉의 석물들에 비해 1.5~2배 정도 크다. 마치 생전 문정왕후의 위세를 보여 주는 듯하다.

 

 

▲ 태릉의 비각

 

 

 

 

보우를 깊이 신임했던 문정왕후는 그의 조언에 따라 원래 서삼릉(경기도 고양시)에 있던 중종의 무덤인 정릉을 봉은사 근처로 옮겨오고(오늘날의 선정릉 자리),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그 곁에 묻히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태릉 자리에 홀로 묻히게 되었다. 지관이 주장하기를 이장했던 중종의 무덤이 터가 좋지 않고 지금의 공릉동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야 나라가 태평해진다고 하여 아들인 명종이 이곳에 어머니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대

 

 

대부분의 조선 왕릉은 왕과 왕비가 합장되어 있거나, 아니면 봉분이 붙어 있는 쌍릉 형식으로 만들어졌지만 태릉은 왕과 떨어져 왕비 홀로 묻혀 있는 단릉이다.

 

 

태릉은 왕비의 능임에도 불구하고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태릉의 석물들도 문정왕후의 생전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듯 다른 능에 비하여 매우 큰 편이다

 

 

 

▲ 강릉 안내도 | 강릉은 삼육대학교 정문 바로 맞은 편에 있다.

 

 

▲ 강릉 |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인다.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들이자 제13대 왕인 명종과 그의 왕비 인순왕후의 능으로, 능침이 각각 따로 있는 쌍릉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20세까지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였고 인순왕후는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4대 왕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약 1년 동안 수렴청정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선조 8년 창경궁 통명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 능침 | 사진 왼쪽이 명종의 능, 오른쪽이 인순왕후의 능이다. 능침(봉분)이 각각 있는 쌍릉 형식이다.

 

 

▲ 강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 태릉 입구에는 조선 왕릉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어 조선 왕릉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태릉은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촌인 태릉선수촌, 육군사관학교와 인접해 있으며, 강릉은 태릉선수촌과 삼육대학교 사이에 있다. 태릉을 먼저 관람하고 나서, 걸어서 약 15분 거리의 삼육대학교 정문 앞으로 가면 강릉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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