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율 장군 동상 | 행주산성의 정문인 대첩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보인다.
사적 제56호에 지정되어 있는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토성으로, 임진왜란 중 3대첩으로 꼽히는 행주대첩이 벌어진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거둔 가장 큰 승리로 평가받는 3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그리고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이다.
▲ 행주산성 정상에 있는 덕양정 | 한강과 인근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행주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방향 | 멀리 북한산 백운대와 인수봉까지 보인다. 이곳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알 수 있다.
▲ 덕양정에서 바라본 한강 방면
1593년 2월, 행주산성에 주둔해 있던 도원수 권율(1537~1599)이 이끄는 조선군은 불과 2,300명의 군사로 무려 3만 명의 왜군을 물리치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전투 당시에 부녀자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라 무기로 삼았다고 하여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 행주산성의 토성 성벽 | 삼국 시대 때에 이미 흙으로 만든 토성이 있었다고 한다.
본래 조선 시대 이전부터 이곳에는 토성이 있었다고 한다. 행주산성의 토성에서는 삼국 시대의 토기와 기와가 발견되어 이미 삼국 시대부터 이곳에 군사 시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행주산성 정상에 오르면 이곳이 서해안으로부터 한강을 통해 들어오는 적을 막기에 유리한데다가 서울에서 무척 가까워서 군사적 요충지임을 짐작할 수 있다.
▲ 대첩기념관 | 행주대첩과 군사 무기 등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 행주대첩 전황도
행주산성이 일어난 1593년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해이다.
이미 충남 금산군 이치 전투와 수원 독산성 전투에서 왜군에 승리한 바 있는 권율 장군은 한양 수복을 위해 북쪽으로 진군하여 한양과 가까운 이곳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그러자 1593년 2월 12일(양력 3월 14일), 한양 부근에 주둔해 있던 왜군 3만 명이 세 개의 진으로 나누어 일제히 행주산성을 공격해 왔다.
조선군은 백성들과 단합하여 왜군의 공격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 아침부터 시작된 왜군의 공격은 저녁까지 9차례나 이어졌으나 그때마다 조선군의 결사 항전에 막혀 실패하였다. 마침내 왜군은 약 1만 명의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불리는 행주대첩이 조선군의 대승으로 끝난 것이다.
▲ 충장사 입구의 홍살문 |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 충장사 | 1970년에 행주산성을 정비하며 세운 사당이다.
행주산성의 정상에는 행주대첩의 대승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가 두 개 있는데, 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행주대첩비는 1970년에 세운 것으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행주대첩’이란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 대첩비각 안에는 1603년(선조 35년)에 세운 비석이 보존되어 있다.
▲ 행주대첩비 | '행주대첩'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 대첩비각 | 선조 35년에 세운 구비(舊碑)를 보관하고 있다.
▲ 대첩비각 안의 구비(舊碑)
그 밖에도 행주산성 안에는 토성과 권율 장군 동상,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장사,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덕양정, 각종 유물을 보관한 대첩기념관, 영상 교육관인 충의정 등이 있다.
▲ 충의정 | 행주산성 정상에 있는 영상 교육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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