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업원 터(정업원 구기비) |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궁궐에서 물러난 후 평생을 살았던 곳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에 지정되었다.
조선 제6대 단종은 11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불과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끝내 16살에 목숨을 잃은 ‘비운의 왕’이다.
그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무덤인 사릉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포스팅에서 살펴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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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단종에게 커다란 시련이 생겼다. 1456년에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의 단종 복위 운동이라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신분이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때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1440~1521)도 대비의 신분에서 부인의 신분으로 격하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정순왕후는 단종과 떨어져 지금의 흥인지문 근처의 정업원이라는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녀는 그 후 다시는 단종과 만나지 못하고 홀로 정업원에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 정업원 터(정업원 구기비) | 비각 안에 비석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서울에는 정순왕후와 관련된 유적이 몇 곳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바로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정업원 터’이다.
본래 정업원(淨業院)은 당시 도성 안에 있던 여승방(女僧房)이었다. 여승방은 주로 양반 출신의 여인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머물던 절을 말한다. 또한 왕이 죽은 후 궁궐에서 나온 후궁들이 머물기도 하였다고 한다.
민가에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정순왕후는 이곳에 작은 집을 짓고 세 명의 시녀와 함께 머물렀는데 명주를 짜서 옷감을 만들며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이를 딱히 여긴 세조(수양대군)가 식량을 내렸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제21대 왕 영조는 1771년(영조 47년)에 정순왕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녀가 살던 정업원 터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정업원 구기’이다. 비석에 새겨져 있는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다.
이 비석은 높이가 약 2미터인데, 비석 앞면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업원 옛 터’라는 뜻이다. 현재 이 비석은 팔작지붕을 한 작은 비각 안에 보관되어 있다.
▲ 청룡사 | 정업원 터 바로 옆에 있는 사찰로, 정순왕후가 머물던 정업원이 바로 오늘날 청룡사의 전신이라고 한다.
정업원 뒤쪽으로는 야트막한 산봉우리가 있는데 정순왕후는 날마다 이곳에 올라 강원도 영월 방향, 즉 동쪽을 향해 단종의 명복을 빌며 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붙여진 이름이 ‘동망봉(東望峰)’이다.
영조는 이 봉우리에 친필로 ‘동망봉’이란 글씨를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동망봉 일대가 채석장이 되면서 아쉽게도 현재 그 글자는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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