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시대에 만든 아름다운 돌다리
▲ 만안교 | 경기유형문화재 제38호에 지정되어 있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천 지류에 있는 만안교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가 아버지의 무덤인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가는 행차를 위해 세운 다리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본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경기도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시 동대문구)에 있던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 화산(현재 경기도 화성시)으로 옮기고 자주 참배에 나섰으니 이를 가리켜 ‘화산 능행차’라고 한다.
사도세자의 묘는 처음에 오늘날 서울시립대학교 뒤편에 있는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었다.
이때는 ‘영우원(永祐園)’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풍수지리상으로 이곳이 좋지 않다고 하여 정조는 당시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던 수원부 화산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에 사조세자의 무덤 이름은 영우원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899년에 고종 황제가 사도세자의 묘를 융릉(隆陵)으로 격상시켜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정조도 사후에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 묻혀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과 정조의 묘인 건릉을 합쳐 ‘융건릉’으로 부른다.)
효성이 깊었던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인 현륭원을 찾아 나서는 화산 능행차는 정조의 재위 기간 동안 13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해 화성으로 떠난 능행차에는 동행한 사람만 1800명이 넘고, 말도 800여 필이나 끌고 갔다고 한다.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인 현륭원으로 가는 길, 즉 능행차의 코스가 처음부터 안양천을 지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창덕궁을 출발하여 숭례문으로 도성을 빠져 나와 노들나루(오늘날 노량진 부근)에서 배다리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고 동작을 거쳐 남태령 고개(오늘날 사당역 부근)를 넘어 수원 화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오늘날의 시흥시와 안양시를 지나는 코스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남태령 고개가 많은 인원이 지나가기에는 좁기도 하고 산세가 꽤 험난하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이 코스로 가면 영조 때 사도세자를 처벌하는 데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던 영의정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조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무덤을 참배하러 가는 길에 아버지를 죽이는 데 동조한 사람의 무덤을 지나가는 것이 불쾌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2. 만년 동안 백성이 편안하게 건널 수 있게
결과적으로 능행차의 코스는 시흥과 안양을 거쳐 수원 화산으로 향하는 길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안양천을 건너게 되었다.
처음에 안양천을 건널 때에는 임시로 나무로 다리를 만들곤 하였는데, 매번 능행차를 할 때마다 나무로 다리를 만드는 것이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왕이면 평소에 백성들도 하천을 편하게 건널 수 있도록 아예 튼튼한 돌다리(석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만든 다리가 바로 만안교이다.
▲ 다리 위에 서서 바라본 만안교
다리가 놓여 있는 안양시 ‘만안구’ 지명의 유래이기도 한 만안교(萬安橋)는 1795년(정조 19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서유방(徐有防)은 왕명을 받아 3개월의 공사 끝에 만안교를 완성하였다.
‘만년 동안 백성들이 편안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라는 뜻으로 정조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본래의 위치는 지금의 자리보다 남쪽으로 460여 미터 아래에 있었는데, 1980년에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 다리 아래에서 바라본 홍예 부분
▲ 안내문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돌다리로 꼽히는 만안교는 7개의 아치(홍예)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다리이다.
홍예는 ‘무지개’라는 뜻인데, 수문을 이와 같이 둥근 곡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돌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잘 다듬어야 하며 사이사이 돌이 잘 맞물리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
또한 바닥에는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넓은 바닥돌까지 깔았다.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아무런 문제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어졌다. 전체 다리 길이는 약30미터 정도, 너비는 약 8미터, 높이는 약 6미터에 이른다.
현재 다리 근처에는 만안교의 연혁이 기록되어 있는 만안교비가 세워져 있다.
▲ 만안교비 | 만안교를 세울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서유방이 글을 짓고 문신 조윤형이 비문을 썼는데, 다리의 연혁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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