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武)의 신, 관우
▲ 동묘 현판
혹시 여러분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라는 인물을 알고 있는가?
유비, 장비와 함께 도원결의를 맺고 죽을 때까지 촉나라와 유비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던 관우(?~219)는 중국의 삼국 시대인 후한 말기, 우리가 흔히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배웠던 바로 그 시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 속 인물이다.
▲ 하마비 |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 금잡인비 |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 정전 | 동묘의 중심 건물로, 관우의 조각상을 모시고 있다.
소설 <삼국지>가 비록 정사(正史)는 아니지만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 아니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관우라는 인물이 누구보다 용맹스럽고 충성심이 강한 장군이었다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도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무예를 지녔으며, 특히 의리와 충성심이 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에서는 그 정도를 뛰어넘어서 오래 전부터 관우를 ‘무(武)의 신’으로 여겼다.
공자를 ‘문(文)의 신’으로 여겨서 공자의 사당을 ‘문묘’라고 부르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라고 부르며 숭배하였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묘(廟)’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을 뜻한다.
그 관우를 위해 제사를 지냈던 사당이 서울에도 남아 있으니 바로 ‘동묘’이다. 동묘는 ‘동관왕묘’를 줄인 말이다. ‘관왕’은 관우를 왕으로 높여 부르는 말이므로 동관왕묘는 ‘동쪽에 있는 관우의 사당’이라는 뜻이다.
2. 관우의 사당이 서울에 있는 까닭
오늘날 서울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동묘앞’ 역에 내리면 바로 동관왕묘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드는 의문, 중국 사람인 관우의 사당이 왜 서울 한복판에도 있는 것일까?
▲ 내삼문
▲ 동무
▲ 서무
동관왕묘가 현재 위치에 세워진 까닭은 이렇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중국의 명나라는 많은 군사를 파병하여 조선을 도와주었다. 왜군을 물리치고 전쟁이 끝난 뒤, 명나라 황제는 관우의 혼령이 도와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황제는 직접 현판까지 써서 조선으로 보내 관왕묘를 짓도록 요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지금의 위치인 흥인지문(동대문) 밖에 동관왕묘가 세워진 것이다.
1598년,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잃었던 노량해전을 끝으로 마침내 임진왜란이 끝났다. 동관왕묘는 임진왜란 직후인 1599년(선조 32년)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되었다.
동관왕묘는 몇 가지 건물이 세워진 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심 건물은 정전이다. 이 정전을 가리켜 동관왕묘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 일대를 가리켜 동관왕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 좌측에서 바라본 정전의 모습
▲ 정전 안에 모셔져 있는 관우상
정전은 관우의 조각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각상은 나무로 만든 목조상이고, 관우 외에도 그의 아들인 관평과 부하 장수인 주창, 조루, 왕보 등 4명의 조각상도 모셔져 있다.
정전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에서는 보기 힘들고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크기는 앞쪽은 5칸, 옆쪽은 6칸인데, 지붕이 T자 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또한 건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은 점도 독특하다. 이런 특징들은 모두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서울의 동서남북은 물론 전국 곳곳에 관왕묘가 지어졌는데,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서울에 남아 있는 동관왕묘이다. 현재 서울 동관왕묘는 보물 제142호에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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