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복구된 숭례문
지난 2022년부터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국보와 보물의 지정번호가 사라졌지만, 숭례문은 오랫동안 우리나라 국보 제1호로서 마치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숭례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630년 전인 1396년에 세워졌다.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명령으로 한양 도성이 지어졌고, 그 한양 도성의 4대문 중 남쪽 대문으로 지어진 것이다.
숭례문이란 이름에 ‘예(禮)’ 자가 들어간 것은 오행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한양 도성의 4대문과 보신각의 이름에는 유교에서 말하는 오행,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한 글자씩 들어가 있는데 이중에서 ‘예(禮)’가 들어갔다. ‘숭례(崇禮)’는 말 그대로 ‘예를 숭상하다’라는 뜻이다.
숭례문은 그 후에 여러 차례 큰 수리를 거쳤는데, 일제의 침략이 절정에 이른 1907년에는 일본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하게 되자 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 아래로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없앤 자리에는 도로가 생기고 전차가 지나가는 길이 생겼다.
1920년대에 조선총독부는 숭례문을 보물 1호에 흥인지문(동대문)을 보물 2호에 지정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하여 숭례문을 국보 제1호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2008년에 숭례문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숭례문은 문루가 거의 다 불에 타 사라져버렸고, 석축과 일부 문루만 남았다.
결국 2010년부터 대대적인 복구 공사를 벌였으며, 2013년에 복구가 완료되었다. 이때 문의 좌우에 있던 성곽도 함께 복원되었다.
숭례문은 오랫동안 ‘남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단순히 큰 문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듯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문루는 중층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 따르면 숭례문 현판의 글씨는 세종대왕의 형이자 명필로 이름 높았던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논쟁이 많다. 역시 명필로 소문난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설도 있다.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당시에 다행스럽게도 현판은 일부만 훼손되었다.
▲ 숭례문 현판 | 글씨는 세종 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울 남쪽의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세로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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