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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공주의 대표적인 문화재,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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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산리 고분군 전경 | 사적 제13호에 지정된 백제의 왕릉군이다.​

 

1. 무령왕릉의 의의와 가치

 

무령왕릉은 백제의 제25대 왕인 무령왕과 그의 왕비의 무덤으로, 공주시에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면서 백제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무덤이다.

 

이 무덤의 주인인 무령왕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자.

무령왕(461~523)은 백제의 제2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01년부터 523년까지이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무령왕릉은 삼국시대를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고대 왕릉 중에서 무덤이 주인이 아주 명확하게 밝혀진 유일한 무덤이다. 대부분의 고대 왕릉은 기록이나 여러 역사적 사실에 따라 무덤의 주인을 추정하는 데 비해, 무령왕릉은 실제로 무덤을 발굴하였고 그 과정에서 무덤 안에 있는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 축조 연대 등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령왕릉 | 송산리 고분군에서 7번째로 발견된 무덤이다. 

 

 

 

 

지석에 새겨져 있는 기록에 따르면 무령왕릉의 이름은 사마’, 또는 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제24대 왕인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기 전 무령왕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은데, 출생은 일본에서 한 것으로 여겨지며 무령왕릉 지석에는 그가 섬에서 태어났다 하여 사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도 일본 규슈 지방의 각라도라는 섬에는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동굴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에 힘썼으며,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혼란에 빠져 있던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노력한 왕이었다. 또한 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왜(일본)와도 교류하며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하기도 하였다. 무령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성왕이 즉위하였다.

 

 

 

 

2. 웅진 백제 시대의 왕릉군,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여러 개의 무덤 중 하나이다. ‘고분군이란 옛날 고대의 무덤이 여러 개 모여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웅진(지금의 공주시) 백제 시대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있는데, 현재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1~6호분까지 총 7개의 무덤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곳은 무령왕릉뿐이고, 나머지 6개의 무덤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된 상태여서 무덤의 주인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1~6호라는 숫자로 구분되어 있다. 아마 지석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무령왕릉도 그냥 7호분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 중에서 1~5호분은 굴식 돌방무덤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벽돌식 무덤으로 되어 있다. 굴식 돌방무덤은 넓적한 돌을 여러 개 쌓아서 마치 굴처럼 돌로 된 방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보관한 후, 위에는 흙으로 덮어서 봉분을 쌓아 만든 무덤 형식을 말한다. 이렇게 만든 방의 안쪽 벽과 천장에 벽화를 그리기도 한다.

벽돌식 무덤은 6세기 무렵에 당시 중국의 남조로부터 들여온 무덤양식이다. 여러 개의 벽돌을 쌓아 방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모시는 형태이다. 벽돌에는 연화무늬나 글자를 새겨넣었고 천장을 아치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5호분

 

 6호분

 

 

무령왕릉은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인 1971년에 아주 우연히 발견되었다. 5호분과 6호분 무덤에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미 다른 고분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도굴이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무령왕릉은 5호분과 6호분 무덤 사이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았기 때문에 도굴되지 않고 무덤이 처음 만들어진 상태로 온전히 남아 있었다.

 

무덤의 입구부터 벽돌로 빈틈없이 막혀 있는 상태였다. 19717월 발굴단은 드러난 입구의 벽돌을 하나씩 치우면서 발굴을 시작하였다. 맨 처음에 발견된 것은 널방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석수(돌짐승)였다.

 

무덤을 발굴한 결과는 아주 놀라웠다. 무덤 안쪽은 연꽃무늬의 벽돌로 쌓았고, 무덤의 주인공과 무덤을 만든 연대가 새겨져 있는 돌(지석)과 금관, 금팔찌, 금귀고리 등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이러한 벽돌무덤은 그 당시에 중국 남조에서 유행했던 무덤 형식으로, 백제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무령왕릉에서는 총 3천 여개에 달하는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은 오늘날 국립공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무령왕릉 내부 모습(복원 모형) |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만든 벽돌식 무덤으로, 내부가 화려하다.

 

 

 

무령왕릉은 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고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어 무령왕릉과 5호분, 6호분 무덤 안의 실제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으로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우리나라 고고학 연구와 문화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공주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제13호에 지정되어 있으며 공주의 공산성,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과 함께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21년에는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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