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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 용인 심곡서원 ​▲ 심곡서원에 진입하기 전, 삼거리에 하마비와 안내판이 있다. ​ ​▲ 심곡서원 전경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있으며, 사적 제530호이다. ​ ​ ‘서원’이라고 하면 대부분 최초의 사액 서원인 ‘소수서원’이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등이 가장 많이 떠오를 것이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배운 서원에 대한 것은 그것이 거의 전부이다. 서원을 오늘날에 비교하여 쉽게 말하면 지방의 사립학교라고 할 수 있다. 서원과 비슷한 것으로는 향교나 성균관을 들 수 있는데, 이 셋을 쉽게 비유하자면 성균관은 서울의 국립대학, 향교는 지방 공립학교, 서원은 지방 사립학교라고 볼 수 있다. ​ 조선 개국 이후로 오랫동안 정치를 좌우하던 훈구파를 누르고 사림이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조선 중기 이후로 서원이 크게..
조선 시대의 천문 관측대, 서울 관상감 관천대 ▲ 서울 관상감 관천대 | 보물 제1740호 서울시 종로구 계동,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 창덕궁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현대건설 사옥이 보인다. 그 건물 오른쪽에 보면 마치 돌로 된 커다란 굴뚝 같은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 시대의 천문 관측대인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이다. 관상감은 조선 시대에 천문과 기상 관측을 맡았던 기관의 이름이다. 조선 초기에는 ‘서운관’이라는 이름이었다가 세조 때에 관상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관상감이 있던 자리에는 창덕궁에서 지금의 안국동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었는데, 이곳에 서운관이 있었다고 하여 고개의 이름이 운현(雲峴)이었다. 고개의 이름을 따서 바로 인근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저택 이름이 운현궁(雲峴宮)이 되었다. 관상감에 설치된 천..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성,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 강화 삼랑성 동문 | 무지개처럼 돌로 쌓은 홍예문 형식으로, 문루는 없다. ​ 인천광역시에 속한 강화도에는 선사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지석묘)을 비롯하여 고려의 왕궁 터인 고려궁지, 몽골의 침략에 대비해 쌓았다는 강화산성, 강화도령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 초지진을 비롯한 조선 시대의 여러 군사시설 등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또한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과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는데, 마니산 참성단(사적 제136호)과 삼랑성이 그것이다. 특히 사적 제130호인 ‘강화 삼랑성’은 단군왕검의 세 아들, 즉 삼랑(三郞)이 쌓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어 삼랑성(三郞城)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삼랑산성(三郞山城)’ 또는 정족산에 있는 산성이라고 하여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처음..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수원 팔달산 지석묘군 ​▲ 지석묘 1호 수원 화성의 서쪽 성벽이 이어져 있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팔달산 기슭에는 지석묘, 즉 고인돌 4기가 모여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에 지정된 ‘수원 팔달산 지석묘군​(八達山 支石墓群)’은 팔달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수원 시내가 잘 내려다보이는 비교적 낮고 평평한 곳에 총 4기의 고인돌(지석묘)이 남아 있다. 경기도에 드물게 남아 있는 지석묘군으로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우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지석묘 1호는 덮개돌의 길이가 1.3미터, 너비가 약 1미터 정도이다. 지석묘 2호는 길이가 1.8미터, 너비 1.6미터로 이곳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인돌이다. ​​▲ 지석묘 2호 ​ 지석묘 3호는 받침돌로 보이는 비교적 작은 돌들이 흩어져 있고, 덮개돌로 여겨지는 돌은 땅속에 ..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 임해전지) ▲ 경주 동궁과 월지 | 사적 제18호 ​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시대 왕실의 별궁이 있던 자리이다. 월지는 ‘안압지’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엄밀히 말해 안압지는 연못이 있는 정원을 말하며 동궁은 안압지에 붙어 있는 별궁이다. 쉽게 말해 이곳은 신라 왕실의 정원과 그 주변에 세워진 궁궐 전각들이 있던 곳이라고 보면 된다. 에 따르면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때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안압지이다. 안압지는 반월성에서 동북쪽으로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데, 삼국 통일 직후인 674년 무렵에 큰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봉우리를 만들어 여기에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인돌, 강화 부근리 지석묘 ​▲ 강화 부근리 지석묘 | 사적 제137호 사적 제137호에 지정된 ‘강화 부근리 지석묘(江華 富近里 支石墓)’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다. 지명을 따서 ‘강화 부근리 지석묘’라고도 부르고, 그냥 '강화 지석묘'라고도 부른다. 지석묘(支石墓)는 고인돌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여겨진다. 고인돌이란 말은 ‘괸돌’에서 유래되었는데, 청동기 시대에 지배자의 강한 권력을 상징하는 무덤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고인돌의 형태는 넓적하고 거대한 바위와 그 바위를 지탱하는 고임돌(支石), 그리고 그 밑에 있는 무덤방(墓室)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고인돌’이나 ‘지석묘’라고 부르고, 중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권에서는 ‘지석묘’나 ‘대석개묘’, 유럽에서는 돌멘(Do..
거대한 목탑이 있던 황룡사 터, 경주 황룡사지 ▲ 경주 황룡사지 | 사적 제6호 ​ 황룡사는 삼국 시대 신라의 도읍인 경주에 있던 절로, 신라 진흥왕 때인 553년에 월성(月城)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고 하여 그 자리에 궁궐 대신 절을 세우고 붙인 이름이다. 절을 짓는 공사를 시작한 지 무려 17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며, 신라를 대표하는 절로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특히 절 안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탑인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무려 80여 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황룡사와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시대인 13세기에 몽골의 침략으로 불에 타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황룡사 터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 ​▲ 황룡사지 발굴 조감도 황룡사지는 분황사 바로 근처에..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의 명장, 김유신 묘 ​▲ 경주 김유신 묘 | 사적 제21호 ​ ​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김유신 묘는 신라의 삼국 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명장 김유신의 무덤이다. 사적 제21호에 지정된 김유신 묘는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쪽으로 다리 하나(서천교)를 건너면 나오는 송화산(松花山)이라는 작은 산줄기 동쪽의 얕은 구릉 위에 있다. 송화산이라는 이름 그대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김유신 묘 주변을 감싸고 있다. ​ ​ ​​▲ 서울 남산에 있는 김유신 동상 ​ ​김유신(595~673)은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 무열왕(김춘추)과 함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이다. 그의 누이는 김춘추와 혼인하였는데, 삼국통일을 완성한 제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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