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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를 대표하는 전통 가옥, 강릉 선교장 ​▲ 선교장 전경 |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으며, 국가민속문화재 5호로 지정되었다. ​ ​▲ 솟을대문 ​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조선 시대의 고택인 선교장은 본래 전주 사람인 이내번(李乃蕃)이 강릉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이다. 이내번은 효령대군의 11대손으로 18세기 초인 1703년에 이곳에 집을 지어 이주하였다고 한다. 즉, 선교장은 지어진 지 300년이 넘은 저택이다. 선교장은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시대 민가 주택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선교장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경포호가 있어 지나다닐 때 배다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마을의 옛 이름이 ‘배다리마을(선교리)’이었기 때문에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 부엌​ 선교장 안에는 야트막한 산기슭을 뒤로 하여 안채, 사랑채, 행랑채, 별당 등 조선 시대 ..
조선 시대 지방 교육기관, 하남 광주향교 1. 향교와 서원 ▲ 광주향교 외삼문 향교는 조선 시대에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 교육기관이다. 조선 시대의 향교는 각 지방 관아의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유학 교육을 실시하던 곳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따라서 향교는 각 지방에 세워진 공립 중고등학교라고 볼 수 있다. 향교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교육기관으로 서원이 있는데, 서원은 사립 교육기관이다. 오늘날로 치면 사립학교라고 할 수 있다. 향교는 유교 이념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고려 시대에 처음 생겼으나, 당시에는 크게 성행하지 못하고 유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전국의 각 주, 부, 군, 현에 각각 1개씩 향교가 생겼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수원에 있는 조선 시대 공립 학교, 수원향교 ▲ 수원향교 홍살문 | 수원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호이다. 향교(鄕校)는 조선 시대에 지방에 설치된 공립 학교로, 서울(한양)의 성균관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유학 교육과 제사 등의 역할을 맡았다. 또한 향교는 지방 관청의 관할 아래에 있어 지방민을 교화시키는 기능까지 맡았다. ​ 현재 수원시 팔달구 교동에 있는 수원향교는 처음에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와우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 13년인 1789년,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이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화산으로 옮겨지고 수원 화성이 건설되면서 오늘날과 같이 팔달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게 되었다. 수원 화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원향교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1795년에는 이곳 수원향교에 정조가 친히 행차하기도 했다. ​ ​▲ 외삼문 |..
조선 시대의 공립 학교, 전주향교 ​▲ 전주향교의 입구인 만화루 | 전주향교는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145-20(교동)에 있으며, 사적 제379호이다. 만화루는 전주향교의 정문에 해당하는 누각 건물이다. ​ 조선 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은 성균관이었다. 오늘날의 국립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의 하부 조직으로 서울에는 네 개의 학교 즉, 사학(四學, 사부학당)이 세워졌고, 각 지방에는 향교가 세워졌다. ​ ​항교는 각 지방에 세운 공립 학교로, 유학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쉽게 말하면 오늘날의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며, 옛날에는 서당을 졸업하면 지방의 학생들은 향교에 입학하고, 서울의 학생들은 사학에 입학하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향교는 지방의 수령과 관찰사가 직접 관리하였는데, 그만큼 국가적으로 향교와 유학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였..
대한제국 시대의 건축물, 구 벨기에 영사관 ▲ 구(舊) 벨기에 영사관 | 사적 제254호로, 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2076(남현동)에 있다.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이 지나는 사당역에서 남부순환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큰길가에 서양식의 고풍스러운 2층 건물 하나가 눈길을 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붉은색 건물은 대한제국 시대인 1905년에 벨기에 영사관으로 지어진 건물로, 사적 제254호에 지정되어 있다. ​ 1901년에 대한제국과 벨기에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세운 구 벨기에 영사관은 190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05년(광무 9년)에 완성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일본인 건축가 고다마(小玉)가 맡았다. 건물이 처음 세워진 위치는 서울시 중구 회현동 2가로, 현재 우리은행 본점 사옥이 있는 곳이다. 그러..
항일 운동의 상징,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구 서대문 형무소) ▲ 구 서대문 형무소 | 사적 제324호 구 서대문 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일제의 의해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처음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을 탄압한 대표적인 장소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이 갇혀 고문받고 순국하였던 곳이다. 또한 광복 이후에는 독재 정권에 의해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난을 겪기도 했다. ​ ​▲ 1908년의 모습 ▲ 독립운동가 수형 기록표 |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수형 기록표이다. ▲ 격벽장 | 수감자들이 운동할 때에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막고, 감시하기 좋도록 여러 개의 칸막이(격벽) 분리된 공간에 수감자들을 넣어 운동을 시켰던 곳이다. 위쪽 사진은 옛날 모습, 아래쪽 사진은 오늘날의 모습이다. ▲ 전시관 | 형..
정조의 능행차에 사용되었던, 용양봉저정 ▲ 용양봉저정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이다. ​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에서 한강을 건너 강북으로 가기 위해 상도터널을 지나 한강대교 근처로 오면 오른쪽에 돌로 된 작은 언덕 위에 작은 한옥 한 채가 보인다. 이 건물의 이름은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으로 18세기 무렵인 조선 후기에 지어진 정자이다. 용양봉저정은 서울시 동작구 본동에 있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정자의 이름이다. 노량진 근처의 한강대교 남단과 바로 이어져 작은 언덕에 있는 이 정자는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으로 가는 길에 잠시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 본래 이곳에는 행궁(行宮)이 있었다. 행궁은 임금이 궁궐 밖에서 임시로 머무르는 별도의 궁궐을 말한다. ​ 용양봉저정이란 이름을 그대로 해석하면 '용이 뛰..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 서울 정동 제일교회 ▲ 서울 정동 제일교회 | 사적 제256호 덕수궁이 있는 서울시 중구 정동 일대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절인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서양의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이 밀집하여 거주하였던 곳으로, 특히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정동에는 오늘날까지 근대 건축 양식을 보여 주는 중요한 건축물이 여럿 남아 있다. 서울 정동 제일교회도 그런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 정동 제일교회 건물은 1897년에 완성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1885년에 미국의 감리교 목사인 아펜젤러(1858~1902)가 정동에 마련한 작은 한옥에서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시작한 것이 정동 제일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선에서 전도 사업이 정식으로 승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신학문 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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