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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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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집, 심우장 ▲ 심우장(尋牛莊)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은 이름 그대로 ‘성의 북쪽에 있는 동네’이다. 혜화문으로부터 낙산을 거쳐 숙정문(북대문)까지 이어진 한양 도성의 성벽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 있는 이 동네는 또한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라는 유명한 시의 배경이 되는 동네이기도 하다. ​ ▲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골목 아래에 사진과 같은 쉼터가 있다. ​ ▲ 한용선 선생의 동상과 그의 시 '님의 침묵'이 새겨진 돌이 있다. 성벽 아래로 오래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성북동 222번지, 마치 거미줄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이 살았던 집이 있다. 그 집이 바로 심우장이다. 승려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 선생(1879~1944)은 ‘님의 침묵..
고려 시대의 석탑,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 ▲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제101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은 고려 시대의 탑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법천사라는 절에 세워져 있던 탑이다. 법천사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있던 절로,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이 탑은 지광국사(智光國師, 984~1067)의 사리를 담아 지광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탑인데, 지광국사는 고려 성종 때부터 문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을 거치는 동안 고려 왕실로부터 높은 추앙을 받았던 고승이다. 특히 고려 11대 왕 문종(재위 1046~1083)은 지광국사를 왕사(王師)로 삼았다가 훗날 국사(國師)로 추대하기도 하였다. 본래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지광국사는 말년에 자신이 처음으로 출가했던 원주의 법천사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문종은 지광(智光)이..
조선의 왕릉, 고양 서삼릉 ​▲ 서삼릉 입구(사적 제200호) | 바로 오른쪽에 종마목장 입구가 있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는 조선 왕릉이 모여 있는 서삼릉이 있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파주 삼릉, 서오릉과 구별하기 위해서 '고양 서삼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삼릉이란 이름은 도성 서쪽에 있는 3개의 왕릉이 모여 있는 곳이란 뜻에서 붙여졌다. 그런데 서삼릉 주변에는 3개의 왕릉뿐만 아니라 수십 개의 조선 왕족의 무덤이 모여 있다. ​ ​▲ 서삼릉 주변을 감싸고 있는 종마목장 ​ 이미 살펴본 바 있지만 조선 왕족의 무덤은 그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명칭이 구분된다. 능은 왕과 왕비(추존 왕, 추존 왕비 포함)의 무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세손,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 묘는 나머지 왕족..
강화도의 옛 지방 교육 기관, 강화향교 ▲ 강화향교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 ​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강화향교는 고려 인종 때인 1127년에 강화도에 세워진 향교이다. 향교는 오늘날로 치면 '지방 공립학교'라고 할 수 있는데, 유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고려 중기 이후로 향교가 세워지기 시작하였고, 조선왕조의 개국과 함께 각 지방의 중심지나 관아 근처에 향교가 세워졌다. ​ 오늘날 남아 있는 향교 중에서도 고려 시대에 창건되어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닌 강화향교는 그 후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겼다. 조선 시대인 1731년(영조 7년)에 이르러 비로소 현재의 위치인 강화여자고등학교 왼쪽으로 옮겨졌다. 향교 안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하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고, 동무와 서무는 터만 남아 있다..
서울의 관문이었던​, 구 서울역사(驛舍)​ ▲ 오늘날의 모습 ​ ​▲ 일제 강점기 때의 모습 | 이때는 '경성역'이라고 불렸다. ​ 숭례문 근처에 있는 서울시 중구 봉래동2가, 숭례문 인근에 있는 옛 서울역 건물은 숭례문과 함께 오랫동안 서울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청운의 꿈을 안고 기차에 몸을 실어 처음으로 서울에 도착한 지방 사람들은 서울역 광장으로 나와 길 건너편의 거대한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 빌딩)을 바라보며 비로소 서울에 도착했음을 실감하곤 하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서울역 광장은 노숙자들이 모이는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서울 시민들에게 서울역의 이미지는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 ▲ 광장에서 바라본 모습 ​ ▲ 중앙의 출입문 부분 ▲ 출입문 우측 부분 하지만 2004년에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새롭게 서울역사(驛..
백제의 마지막 왕궁터로 여겨지는, 부여 관북리 유적 ▲ 부여 관북리 유적 건물지 ​ ​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부여의 부소산성 남쪽 평지에는 백제의 왕궁터로 여겨지는 관북리 유적이 넓게 펼쳐져 있다. 사적 제428호에 지정된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는 연못과 건물터, 목곽 저장고, 석곽 저장고, 하수도, 공방 시설, 도로 등의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다. 다수의 건물과 유적의 규모, 사비 도성을 감싸고 있던 부소산성과 이어져 있는 위치 등으로 미루어볼 때 사비 시대의 백제 왕궁이 있던 곳이 확실해 보인다. 유적 내에서는 백제 시대에 만든 도로와 배수시설 등도 발굴되었고, 특히 연못에서는 연꽃무늬 수막새, 토기, 금동제 귀걸이, 목간(나무판에 글씨를 새긴 것), 등잔, 철창, 철촉, 목제품 등 많은 양의 백제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 ​ ​▲ 석곽 창고 ​ ..
백제 시대의 우물이 발견된, 부여 구아리 백제 유적 ▲ 부여 구아리 백제 유적 | 백제 시대의 우물이 나온 유적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88호에 지정되어 있다. 부여의 부소산성 남쪽으로 드넓게 펼쳐져 있는 관북리 유적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성과 왕궁이 있던 곳으로, 백제인들의 생활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부소산성과 관북리 유적에 비해서는 덜 알려져 있지만, 관북리 유적 바로 아래 백제 성왕의 동상이 있는 로터리 근처에도 백제 시대의 유적이 있으니 바로 구아리 백제 유적이다. ​▲ 발굴 당시의 모습 ​ ​ 구아리 유적에서는 백제 시대의 우물이 2개가 발견되었다. 우물은 둘 다 사각형 모양으로, 자연석과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가장자리를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우물 2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물 안에서는 백제 시대의 기와와 토기, 수막..
조선의 왕릉, 파주 삼릉 ▲ 공릉 | 파주 삼릉은 사적 제205호에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 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다. 조선의 왕릉은 대부분 서울시와 경기도에 몰려 있는데, 그 이유는 에 왕릉은 한양 도성에서 10리(약 4km) 밖, 100리(40km)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이것은 왕이 왕릉을 참배하러 갈 때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를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 창덕궁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는 조선의 왕릉 3기가 모여 있는 ‘파주 삼릉’이 있다. 3기의 능은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인데, 앞 글자만 따서 파주 삼릉을 ‘공순영릉’이라고도 부른다. ​ 조선 왕릉은 조선 시대의 왕과 왕비의 무덤입니다. 현재 북한 개성에 있는 2기를 비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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