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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왕릉이자 최초의 황제릉, 홍릉과 유릉(홍유릉) ▲ 홍릉 ▲ 유릉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유릉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과 그의 비인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 그리고 제27대 왕인 순종과 순명효황후, 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인 유릉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홍유릉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릉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황제릉이다. ▲ 홍유릉 안내도 홍유릉은 다른 조선의 왕릉과 그 형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이전의 ‘왕릉’과는 다른 ‘황제릉’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의 석물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고종 바로 이전의 왕인 철종의 무덤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상황이나 왕의 의지에 따라 무덤의 조성 양식은 조금씩 바뀌긴 했으나..
조선의 왕릉, 태강릉(태릉과 강릉) ▲ 제11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무덤인 태릉 서울에서 ‘태릉’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국가대표 선수촌이 있던 ‘태릉 선수촌’이 떠오르곤 한다. 또한 태릉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잡고 있는 태릉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계비(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이자 13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무덤이다. 그리고 태릉에서 동쪽 언덕으로 이어져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제13대 왕이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과 그의 비인 인순왕후의 무덤인 강릉이 있다. 이 두 왕릉, 즉 태릉과 강릉을 합쳐서 ‘태강릉’이라고 부른다. 태릉과 강릉은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의 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 태릉의 소나무 숲은 역사..
흥선대원군의 쇄국 의지, 청주 척화비 ▲ 청주 척화비 청주 척화비는 19세기인 조선 말기 흥선 대원군이 집권할 당시에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중에서 충청도 청주목에 세웠던 척화비이다. 현재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중앙공원 안에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23호에 지정되어 있다. 척화비는 한마디로 흥선대원군의 쇄국 의지를 나타내는 비석이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글자 그대로 외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거부한다는 쇄국의 의지를 밝힌 비석이다. 1866년 프랑스 군대가 침략한 병인양요,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발각된 사건 등이 일어나자 흥선 대원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 아산 현충사 ▲ 현충사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자리한 현충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무장으로 꼽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1706년(숙종 32년)에 세운 사당이다. 현재 사적 제155호에 지정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되새기기 위한 사당은 현충사 외에도 전국 곳곳에 수십 개가 있다. 그중에서도 현충사는 가장 규모가 크며 널리 알려져 있다. ▲ 현충사 경내의 입구인 충무문 ​ 본래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오늘날의 서울시이다. 서울시 중구 건청동(현재 서울시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태어난 이순신 장군은 어린 시절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현충사 부근의 외가에서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무예를 연마하며 머물렀다고 ..
조선의 왕릉, 헌인릉(헌릉과 인릉) ▲ 헌릉 | 조선 3대 왕 태종과 왕비인 원경왕후의 능으로, 봉분이 각각 있는 쌍릉 형식이다. 헌인릉은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조선의 왕릉으로, 헌릉(3대 왕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의 능)과 인릉(23대 왕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의 능)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사적 제194호에 지정되어 있다. 우선 헌릉은 조선 제3대 태종과 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이다. 합장릉이 아닌 봉분이 각각 있는 쌍릉으로 되어 있다. 조선의 왕릉이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시대에 따라 조금씩 그 형식이 달리 조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헌릉을 보면 조선 초기의 왕릉 양식을 알 수가 있다. 우선 봉분의 크기가 다른 왕릉에 비해 매우 크다. 게다가 석물의 크기도 매우 크고 문인석과 무인석이 2쌍씩 세워져 있다. 다른 ..
한양 도성의 북대문, 숙정문 ▲ 한양 도성의 북쪽 대문인 숙정문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조선왕조를 창업하고 나서 도읍을 개경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긴 후 도읍의 경계를 둘러싼 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오늘날 서울 성곽으로 불리는 한양 도성이다. 한양 도성에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각각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만들어 도성을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4개의 대문은 가장 널리 알려진 숭례문(남대문)을 비롯하여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그리고 북쪽 대문인 숙정문이다. 이중에서 일제 강점기에 완전히 사라진 돈의문을 제외하고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도심에 위치해 있어 서울 시민 누구나에게나 익숙한 문이다. 그러면 북쪽 대문인 숙정문은 어떨까? 서울 시민 중에도 숙정문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3.1 운동이 시작된, 탑골공원 (파고다 공원) ▲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 | 탑골공원은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흔히 ‘파고다 공원’이란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탑골공원은 서울에 최초로 만들어진 근대식 공원이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1890년대로 알려져 있다. ​ 서울시 종로구 한복판에 자리 잡은 탑골공원은 3ㆍ1 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그 의의가 크다. 1919년 3월 1일, 수천 명의 사람이 이곳에 모여 1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곳의 팔각정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만세 운동은 전국 방방 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 ​ ▲ 탑골공원 팔각정 ​▲ 탑골공원의 옛 모습 |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보인다. ​ ▲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 | 현재는 유리관으로 덮어서 보호하고 있다. 이..
근대식 사립 교육기관, 구 배재학당 ​▲ 구 배재학당 동관(현재 배재학당 역사 박물관) ​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의 선교사인 아펜젤러(1858~1902)가 설립한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제대학교의 전신이기도 하다. 설립자는 아펜젤러는 평생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헌신했으며 배재학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동제일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가 세운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그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와도 절친한 사이였으며 그런 연유로 연세대학교 안에도 그의 정신을 기리고자 이름을 딴 건물(아펜젤러관)이 있다. 또한 그의 딸인 앨리스 아펜젤러는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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