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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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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릉, 김포 장릉 1.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무덤 ​▲ 김포 장릉(사적 제202호) | 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 왕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이다. 조선의 왕릉 42기 중에는 ‘장릉’이란 이름을 가진 능이 3개나 있다.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16대 인조와 인열왕후의 무덤),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莊陵:6대 단종의 무덤), 그리고 지금부터 살펴볼 경기도 김포의 장릉(章陵)이다. 김포에 있는 장릉은 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 왕 원종과 부인인 인헌왕후의 능이다. 흔히 다른 장릉과 구분하기 위해 ‘김포 장릉’이라고 부른다. 사적 제202호에 지정되어 있는 김포 장릉은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16대 왕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추존 왕)과 부인의 무덤이다. ▲ 김포 장릉 재실 | 재실은 평상시 왕릉을 지..
'서궐'이라고 불렸던 조선의 궁궐, 경희궁 1. 광해군이 세운 경희궁 ▲ 숭정전 | 경희궁의 정전(중심 건물)로 복원된 건물이다. 본래의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내에 있다. 조선 왕조의 도읍지였던 한양, 즉 지금의 서울에는 조선 시대의 궁궐이 5개나 남아 있다. 바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자 으뜸 궁궐인 경복궁을 비롯하여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다. 이 중에서 경희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그 존재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경희궁을 처음 세운 사람은 제15대 왕이자 훗날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다. 본래 경희궁이 있던 자리에는 제16대 왕인 인조의 아버지, 즉 정원군의 집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왕기(王氣: 임금이 날 조짐)가 서려 있다고 말을 들은 광해군이 이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짓도록 하고 이름을 ‘경덕궁’이라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근대 건축물, 다산관 · 창학관 · 대륙관 ​▲ 다산관(공릉동 구 서울 공과대학) | 등록문화재 제12호 ​ ​ 대학교 캠퍼스 안의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4번째로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를 찾아가 보았다. 옛날에 이곳은 서울산업대학교였는데 지난 2010년에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이름이 바뀌면서 일반대학교로 바뀌고 국립 종합대학교가 되었다. ​ ▲ 다산관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 서울대학교의 전신은 옛날 일제 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교였다. 광복 후에 새롭게 개교한 서울대학교는 경성제국대학교의 캠퍼스와 건물을 그대로 많이 사용하였는데, 오늘날과 같이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관악캠퍼스로 모이기 전에는 각 단과대학별로 서울 여기저기에 캠퍼스가 흩어져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대학로 일대(마로니에 공원 일대..
한옥으로 지어진 성당 건축물, 성공회 강화성당 ​▲ 성공회 강화성당 | 사적 제424호에 지정되어 있다. ‘성공회’는 기독교의 한 분파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영국에서 분리하였기 때문에 영국국교회, 영국성공회, 또는 영국교회라고도 불린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을 통해 16~17세기에 유럽에서는 ‘프로테스탄트’(우리나라에서는 신학이라고도 부름)라고 불리는 여러 분파가 일어났는데, 종교 개혁의 결과 영국에서는 성공회가 탄생하였다. 고종 때인 19세기 후반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대한성공회는 바로 이 영국성공회의 한국 교구로, 1889년에 설립되었다. ​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는 고프 주교(Charies Jone Corfe, 한국명은 고요한)였는데, 그는 7년 뒤인 1896년에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사람에게 세례를 ..
자주독립의 상징, 독립문 ▲ 독립문(사적 제32호) 19세기 말, 일본과 러시아, 청나라 등 밀려오는 외세의 간섭으로 조선의 운명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서재필을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협회는 민중을 계몽시키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자주독립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펼쳤다. 서재필(1864~1951)은 1884년 김옥균과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등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3일 천하’로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학업에 전념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했으며, 미국 시민권까지 취득하기도 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나 역적이라는 죄명이 벗겨지자, 그는 1895년 말에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결정하고 을 창간하기도 했..
단종의 슬픔을 간직한, 청령포와 장릉 1. 강원도 영월에 유배된 어린 왕 ▲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 지금도 배를 이용해야만 오고갈 수 있다. ▲ 단종이 청령포에서 머물렀던 집 ▲ 단종이 한양을 그리워하며 돌로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망향탑 장릉은 조선의 제6대 왕인 단종(1441~1457)의 무덤으로, 현재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있다. 다른 조선 왕들의 무덤은 모두 서울이나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에 남아 있다. 그런데 단종의 무덤만은 서울에서도 너무나 멀리 떨어진 강원도에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불운한 왕이다(재위 1452~1455).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단종은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세종 대왕은 어린 손자가 걱..
동북 9성을 축조한, 파주 윤관 장군 묘 1. 동북 9성을 쌓은 고려 전기의 장군 ▲ 파주 윤관 장군 묘 | 사적 제323호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는 고려 시대의 명장인 윤관 장군의 묘가 있다. 고려 시대의 거대 불상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에서 북쪽으로 약 2킬로미터 거리에 떨어져 있는 윤관 장군묘는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윤관(尹瓘)은 고려의 개국 공신이었던 윤신달(893~973)의 후손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윤관 장군묘가 있는 파주시의 옛 지명이 바로 ‘파평(坡平)’이다. 그리고 파평 윤씨의 시조는 윤신달이며 윤관 장군이 중시조이다. 여기서 잠깐 파평 윤씨 가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워낙 유명한 가문이기 때문에) 이 가문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여럿 배출되었다. 윤관 장군을 비롯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마을, 안동 하회마을 1. 마을을 감싸 안으며 흐르는 낙동강 줄기 ▲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 마을 전경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속 마을인 안동 하회 마을이 있다. 이곳은 무려 600년 이상 풍산 류씨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현재도 약 150여 호의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하회(河回)’라는 마을 이름은 낙동강 줄기가 마을을 S자 모양으로 감싸 돌고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하회 마을에 들어가 오른쪽 강변을 따라 가면 나루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면 부용대라는 절벽이 있다. 이 절벽 위에서 바라보면 하회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을 감싸 안으며 흐르는 강물과 기와집, 초가집이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과 같은 광경을 만들어 낸다. ▲ 옥연정사 | 류성룡이 을 쓴 곳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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